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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재료 불문, 미술의 관습에 맞서온 독보적 60년
  • 작성일2020/12/02 10:00
  • 조회 344

국립현대미술관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전
한국 실험미술 대표 작가의 작품 250여점 망라

국립현대미술관 야외 마당에 걸린 ‘바람’ 연작 앞에 선 이승택 작가. 푸른 색 천은 1970년 홍익대에 설치됐었고, 뒤쪽 색띠는 198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둘다 다시 제작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야외 마당에 걸린 ‘바람’ 연작 앞에 선 이승택 작가. 푸른 색 천은 1970년 홍익대에 설치됐었고, 뒤쪽 색띠는 198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둘다 다시 제작했다.

“이건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아주 대단한 작품이에요.”

88세 노(老)예술가가 전시장에 빼곡히 들어찬 작품들을 둘러보며 연신 말했다.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고,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지난 60여년간 남들이 안 가는 길, 못 하는 일들만 골라서 해 온 한국 실험미술 대표 작가다운 면모였다. 이런 확고한 신념과 넘치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시대를 앞서가는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거침없이 쌓아올 수 있었으리라.

이승택. 홍익대에서 조각을 전공했지만 설치, 회화, 사진은 물론 대지미술과 행위미술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적 촉수는 경계 없이 뻗어 나갔다. 전통옹기, 비닐, 각목, 연탄재 등 일상 사물들을 조각 재료로 끌어들였고, 바람과 불, 연기 등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활용한 ‘형체 없는 작품’을 실험했다. 지금에야 흔한 재료이고, 익숙한 창작 방식이지만 1960~1970년대에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1968년 발표한 ‘무제’. 당시 산업화 신소재였던 비닐을 조각의 새로운 재료로 활용했다. 전시에는 2018년 재제작한 작품이 설치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1968년 발표한 ‘무제’. 당시 산업화 신소재였던 비닐을 조각의 새로운 재료로 활용했다. 전시에는 2018년 재제작한 작품이 설치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의 고정관념과 경계에 도전해 온 그의 실험예술 여정을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을 서울관에서 열고 있다. 1960년대 초기작부터 현재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제작한 작품 250점이 실내 전시실과 야외 마당 등 미술관 안팎에 펼쳐졌다.

지난달 24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고, 거꾸로 생각했고, 거꾸로 살았다”고 돌이켰다. “뭐든 거꾸로 하다 보니 저절로 좋은 작품이 되더라”고도 했다. 조각이 아닌 비조각, 미술이 아닌 비미술을 지향한 그의 예술관은 ‘거꾸로 미학’으로 불린다.
전통옹기를 탑처럼 쌓아 올린 ‘성장(오지탑)’. 1964년 작품으로, 올해 다시 만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전통옹기를 탑처럼 쌓아 올린 ‘성장(오지탑)’. 1964년 작품으로, 올해 다시 만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나무를 헝겊과 노끈으로 묶은 ‘무제’(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나무를 헝겊과 노끈으로 묶은 ‘무제’(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시작은 돗자리를 짤 때 실을 감는 고드레돌이었다. 대학 신입생 때 동기들과 야외 사생을 간 덕수궁에서 우연히 본 고드레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돌, 여체 토르소, 도자기, 책, 지폐 등을 노끈으로 감는 ‘묶기 연작’이 탄생했다. 옹기를 탑처럼 쌓아 올린 조각을 좌대 없이 바닥에 놓거나 비정형의 오브제를 천장에 거는 등 자유로운 설치 방식도 당시 기성 조각의 문법을 깬 파격적인 시도였다.

1970년 홍익대 빌딩 사이에 100m 길이의 푸른 색 천이 매달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시시각각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이 작품에 작가는 ‘바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화판에 불을 붙여 한강에 떠내려 보내는 행위미술을 통해선 물과 불, 바람 등 자연적인 요소를 두루 끌어들였다. 홍익대 ‘바람’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70m 길이로 다시 제작돼 미술관 사무동 건물과 교육동 건물 사이에 설치됐다. 나무 사이에 형형색색 띠를 묶어 바람에 휘날리게 한 1988년작 ‘바람’도 종친부 마당에 재연됐다.
‘이승택 분신행위예술전’영상(1989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이승택 분신행위예술전’영상(1989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그을음 흔적이 남은 보드와 벽에 페인트를 칠한 1996년 작품 ‘녹의 수난’.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그을음 흔적이 남은 보드와 벽에 페인트를 칠한 1996년 작품 ‘녹의 수난’.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승택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역사, 환경, 무속 등으로 관심사를 확대하며 퍼포먼스, 대형 설치, 사진 등으로 작업 영역을 확장했다. 동학농민혁명, 남북분단을 주제로 한 설치 작품들과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지구 행위 퍼포먼스’ 등을 펼쳤다. 불을 태워 그 흔적을 작품으로 수용한 ‘그을음 회화’나 물을 흘러내리게 한 뒤 그 변화 과정을 담은 ‘물그림’처럼 전위 미술가로서의 행보도 인상적이다.

한 시대의 실험은 시간이 지나면 보편이 되거나 흔적 없이 사라진다. 오랫동안 미술계의 아웃사이더였던 이승택은 10여년 전부터 국내외에서 각광받고 있다. 영국 화이트큐브, 미국 뉴욕 레비고비갤러리 등에서 전시를 열었고, 영국 테이트모던과 호주 시드니현대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내년 3월 28일까지 계속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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