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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Kim Hee Jin

  • 1996년 생

  • 서양화 조각/설치 사진 기타

작품보기

학력 / 경력

서강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서울특별시 청년창작자 전시활동 지원사업 수혜자, 국립현대미술관-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공동기획 프로그램 '2020 예술교육 프로그램 <틈> 수료,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동부창고) 미술 강사, 임시공간 로컬 큐레이팅 포럼 2020 수료, 인천 오픈 유니버시티 2020 수료, 2020 박물관·미술관 교육아카데미 2차 기본교육 수료 외 다수.

전시회이력

단체전
아트노이드 178, 스물 – 표면적 표상 , 2019
아트노이드 178, 잠시 멈춤 , 2020
더 명동 갤러리, 2020 비상展 , 2020

개인전
문래동 비닐하우스, 움직이는 숲, 2020

수상이력

작가소개

나는 연기자다. 지금은 겨우 지역의 작은 한 극단의 말단으로 일하고 있지만 꽤 오랜 시간, 진지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공연을 끝낸 거인을 뒤로하고 잠시 불이 켜진 계단으로 나와 난간에 기댔다. 불이 꺼진다.
배우의 몸, 그 중 높은 비중으로 얼굴은 외부와 공존하는 증거, 자극이자 그 반응이다. 또 이것은 꽤 오랜 시간을 담보로 하는 저항 작업이다. 그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마음에 떠오른 색을 몸에 칠한다. 색은 이름이 없어도 좋다만 나는 극장에 없을 흰색에 흰색, 또 흰색을 덧칠했다. 크기는 내 양팔로 안을 수 없는 정도이다. 사실은 언젠가부터 언어 이전의 것, 조형 이전의 것, 그리고 추상 이전의 것을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를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기, 하지 않기를 반복하다 그 반복 자체가 내가 찾던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흰 그 원형에 하얀색과 검은색의 혼합을 세상에서 떼어냈고, 그 안에 떠오르는 것과 떠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 양어깨에 나누어 메었다. 강박적으로 대조를 만들어낸다. 그렇지 않으면 현기증이 나 얼굴을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 과도하게 전근대적이지만, 한결 편한 방법이다. 저자는 항상 엽기적인 방법으로 양분을 얻는다. 연극적 또는 영화적이라는 수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극과 영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가죽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공장이 발달하고, 돈을 주고받고, 몸을 사고팔면서 연극과 영화의 경계는 변화하여 정립되었다. 또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각각이 가질 수 있는 먹물적 특성은 비교적 분명해졌다. 한정된 본질로서 연극에는 물질성, 영화에는 평면성이 담보되었다. 여기서 영화에게 깊이를 빼앗았다고 오독하지 않아야 한다. 연극은 계속 이야기하듯 그 끝없는 감각과 행위를 중첩하여 이미지를 만들고, 이는 환영이 아닌 자기 모순적 실재가 된다. 작업의 감각과 의식 및 무의식을 탐구하여 표현하는 탐구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2-3차원 내의 재현에서 그 자체의 감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한 편, 물질은 그 자체로 매우 구체적이다. 그렇다면 비연극적 영화란 해체된 실재로 허구적 추상을 만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논의나 비평의 쟁점은 연극에 반대하는 연극을 연기하는 연극, 또는 영화를 파괴하는 영화를 촬영하는 영화. 즉 경계에 관련한 고민이다. 각자에게 강요되었던 본질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열렬히 밝히는 작업에게 주어진다. 표면이란 껍질이고, 허상이란 없다. 다시 주관과 객관에 관련한 혼돈이 찾아온다. 나름 유쾌한 결과다. 마치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화가 난 사람과 같다.
이제 만들어진 쌍을 합친다. 이 때 신체나 정신은 손으로 기능하는 어떤 것의 문법을 따른 것이다. 적당히 대칭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상반된 방향으로 외력을 줘야하기 때문이다. 목적은 합체, 통일이지만 그것이 실현가능하지는 않다. 그래도 편의상 두 가지의 성질을 가진 하나라고 취급하여 두 개인 대상을 적당히 다루는 것이다. 이제 조물조물 신체를 이용해 대상의 모양을 바꾼다. 어떤 것을 재현할 의무는 없지만, 관성이 나서서 행위를 제한한다. 세계는 공손한 편의성처럼 행동하며 나를 다시 편입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의미는 사라지고, 의미가 사라진다 함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다음으로 처음 생각한 색을 세 가지로 나눈다. 여기서 더러움이나 역겨움, 차별 등이 분명히 도움을 주리라. 익숙하고 변태적인 몸짓으로 3차원 화면에 칠한다. 나는 하얀색과 붉은색 또 푸른색을 선택했고, 거친 몸으로 화면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문질러 없앴다. 이리저리 칠한 것을 또 가리고, 막을 다시 벗긴다. 흰색은 붉은색이 되었고, 붉은색은 푸른색이 되었으며 다시 푸른색은 흰색이 되었다. 폭력에 의해 순환적이지만, 점점 자발성을 갖는다. 이 과정의 혐오는 필연적이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뜻이다.
이제 기억이 개입한다. 이는 정보를 조직화하고, 저장하여 다시 꺼내는 능력을 이야기한다. 역사로서 미래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관여하고, 맥락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이 순환의 전체를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감각과 표현은 절대로 완벽히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둘은 반드시 기억을 매개로 이어진다. 또 그의 선후관계도 명확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굉장히 가변적이다. 파괴적이고, 무참하다. 때때로는 그냥 다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제멋대로인 마음이 아파서, 지나치게 긴장한다. 하지만 내 뜻대로 그만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표현을 시작했다. 조금 더 나에게 솔직하기 위해 지금 몸을 움직인다. 건드리는 물질들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표현은 나타남을 의미하고, 그는 예민한 감각을 선행한다. 융기된 이마 위에 눈썹이 무성하다. 너무나 많은 얼음이 녹아 흐른다. 지나치게 결핍된 연기가 뿜어진다. 어제 걸은 오거리의 전등이 네 개에서 세 개로 줄었다고 들었다. 몇 개가 더 사라져도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거진 머리에 먹을 떨어뜨린다.
이제 표현을 위한 감각을 시작하자. 기억은 모양의 암기가 아니다. 지금의 감각과 그 해석을 온전히 그대로 읽어내야 한다. 가장 강렬한 자극은 무엇이었는지, 그 다음은 무엇이었는지 하나씩 짚어낸다. 이 과정에서도 강요의 폭력에 맞선다. 물리적 감각을 넘어선 기억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기억은 수동적 행동을 한다. 폭력과 결핍 중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가면을 쓰고 숨을 참아 몸을 던진다. 이 때 누구도 관조해서는 안 된다. 관찰과 접촉 및 개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한다. 순수의 역학은 허상이다. 맥락 없는 관찰은 역사의 부정이고, 역사의 부정은 존재의 부정이다. 반대로 모두가 안다고 믿는 지식은 방을 나서는 순간 깨지고, 이해는 파괴와 함께한다. 차라리 모른다고 믿는 것이 덜 아프다. 세계는 생각만큼 매끄럽지 않다. 또한 매우 정교하기 때문에, 추론을 담보하고. 부분을 살펴야 한다. 다시, 당위와 가치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질의 특별함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기능과 맥락을 꾸준히 수용해야 한다. 군중이 한꺼번에 속닥여 머리가 아프다. 진통제를 몇 알 삼키기 위해서는 소화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반대로 뿌리 주변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 상처를 껴안는 것이 두 번째 과정이다. 소외된 것을 인정하고, 놓치거나 잃은 것도 빠짐없이 기억할 때 내 모호한 경계가 세워진다. 모순된 공리의 휘발성은 고무를 여기 고정하지 않는다. 항상 저항하고 새로운 가공을 받으며, 날 것이 되어 싸운다. 결정할 수는 없지만, 강요된 대칭의 몸이 강요의 주체를 변형하는 것이다. 만들기란 미움에서 시작된다. 진부한 폭력을 가하고, 굴곡을 만들며, 권력관계를 상기시킨다. 이렇게 태어난 몸과 몸짓은 혐오의 극복과 사랑으로 이어진다. 둘은 중첩되어 있지만, 절대로 일치하지 않는다. 완전함은 허상이고 몸짓은 영원함에 근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핑계로 상황을 종결할 수 없다. 영혼은 영혼이고, 신체는 신체다. 높은 장벽, 그보다 넘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이유로 진부한 자위만 한다면 정체성을 잃는다. 다양한 봉우리가 있음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성찰의 층위가 겹겹이 쌓인다. 귀족의 무결함에 종양을 끼워 넣는다. 증식이 낳는 아름다움도 있는 것이다. 내 신체는 소비되기 위한 기호로 존재하는 자극체이다. 온전히 드러내는 것보다 살짝 가린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전하는 욕구를 해방하듯이, 나의 몸은 기표로서의 불확실함과 경계 없는 행인을 가리킴으로서 관객의 흥분을 도모한다.
그렇다면 왜 몸이어야 하는가. 차라리 약속된 평면의 언어를 갖고 자본의 힘을 가진 일상을 살면 달콤한데. 이유는 내가 여기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가진 권력은 내가 필요로 하는 궤적을 웃돌아 아예 없는 것이 나에게 더 좋다.
그럼에도 나는 자주 무너진다. 나는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지금을 버티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리 대단치 못한 것 같다. 뭔가 보여주고 싶어 근질근질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보여야할지 잘 모르겠다. 당장의 가슴이라도 열어서 꺼내야하나. 처음에 다 그런 것이라 위로받고자 해도 어린애가 아니다. 계속 말을 헛돌게 한다. 씹고 있는 것은 많은데 삼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작은 기호를 보아도 크게 해석하여 애먼 하늘을 무너뜨린다. 아무 단어에 나를 삽입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자꾸 보고 싶다. 체화되지 않은 논리를 읊조리고 싶다. 감정의 선적 기복이 대단히 심하다. 그것은 일정하지 않고 질서 없는 것이라, 질서의 질서도, 그 위의 질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길을 잃었다기보다는 없는 길을 구태여 떼쓰고 있는 것 같다. 얼음은 녹아 증기가 되기도 한다. 묵언의 힘을 잊었다. 최소한의 소통으로 할 수 있는 동작과 대사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냥 열등함이 차올라 상실감을 증폭한다. 무대 위에서 숨이 찬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해서 숨이 찬다. 작품에 균열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짓밟는다. 심오한 감정을 잡는 것이 아닌데,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정말로 고요한 관객 속에서 고독한 발작을 보인다. 일상적인 신체를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 땀을 흠뻑 적신다. 신화에 나오는 대결을 하듯, 통렬하고 도발적인 배설을 한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수행에 나선 포도는 알알이 영글어 서로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 무모한 분자들은 집단 없는 투쟁을 하는데, 나는 정신없이 딸꾹질을 하다 커튼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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