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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사진전 《거울 속의 앵무새》

LEE JIHAE Solo Exhibition 《A Parrot in the Mirror》

  • 작가

    이지혜

  • 장소

    K.P 갤러리

  • 주소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 (후암동, 함주캐슬)

  • 기간

    2022-09-14 ~ 2022-09-24

  • 시간

    11:00 ~ 18:00 (휴관일 : 매주 일요일 ,월요일)

  • 연락처

    02-706-6751

  • 홈페이지

    http://kpgallery.co.kr

  • 초대일시

  • 관람료

    무료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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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기억과 정체성

이지혜의 이번 작업은 자화상에서 시작해서 자화상으로 끝난다. 처음 등장하는 자화상은 터번 같은 모자를 쓰고 맨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다. 마지막 자화상은 여러개의 안경을 겹쳐 쓴 지극히 불안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 하는 흑백 사진이다. 이 두 자화상 사이에 이지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느낌, 기억, 공포, 불안, 희망 등이 들어 있다.

이지혜는 자신의 작업이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을 앓다 돌아가신 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아버지, 기억이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인격을 가진 다른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즉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을 겪어보면 알 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육체이지만 동시에 육체를 지탱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 생존의 수단은 기억이다. 그 기억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기억들 – 나는 누구인가, 가족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는 어디에 살고 있고 무엇을 하나 – 등등이 점점 사라져 가면 누구나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가장 아이러니 한 것은 환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물론 망각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망각 능력은 의식의 영역 밖에서조차 기억되는 트라우마의 상처를 지우는 능력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런 기억을 지우고 살아간다. 하지만 기억을 부분적으로 잃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모르는- 즉 시공간의 착각과 혼돈은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삶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이지혜의 작업은 아버지의 알츠하이머에서 자신에 대한 시각으로 옮겨와 ‘만약 내가 기억을 잃는다’면이라는 경우를 상정하고 동시에 그것이 보편적인 공포임을 말하려 한다. 이런 시각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해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에 대한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서류를 작성 서명해야겠다든가, 장기기증 서약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이런 태도에 대해 항간에 떠도는 최고의 농담은 99-88-23-4일 것이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아프고 편하게 죽는 것 말이다. 이는 사실 농담이 아니라 나이든 이들이 가장 강력하게 바라는 진실에 가깝다. 진실이 농담의 형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절실하나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장 뤽 고다르는 ‘예술은 리얼리티의 반영이 아니라 그 반영의 리얼리티’라고 한 적이 있다. 이는 일반적인 예술의 상식을 뒤엎는다. 예술이 현실을 얼마나 닮고 반영했는가가 아니라 반영의 형식이 어떠한가, 그것이 어떻게 현실을 표상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면 알듯이 그의 영화 자체는 현실을 복제하듯 옮겨 놓은 경우는 없다. 설정은황당하고, 서사 구조는 중요치 않고 일종의 환상에 가깝지만 그의 이미지들과 등장 인물들이적시하는 내용들은 날카롭게 현실을 풍자하고 찌른다. 즉 영화는 현실의 거울이 아니지만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현실적 리얼리티인 것이다.

이지혜가 사용하는 전략도 이와 유사하다. 이지혜의 사진 작업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 있다.그 간극 사이에서 사진 이미지로 말을 하고, 수단으로 영화와 집안의 소품들을 이용한다. 영화는 주로 알츠하이머 기억을 다룬 영화들의 장면들이고, 집안의 소품들은 장식적이고 비상적이거나 혹은 스크린 역할을 할 수 있는 대다수의 사물들이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거울, 간유리, 시계 등은 기억과 관련된 사물들이다. 비교적 뚜렷한, 분장을 했지만 자신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자화상의 거울을 지나면 반투명한 간유리 너머 등장한 인물과 사물은 흐릿하다. 유리에 가까이 있으면 뚜렷하고 멀어지면 흐려지는 앵무새, 꽃, 인체의 부분 등은 모두 사라져가는 기억에 대한 일종의 은유이자 상징이다. 더구나 달리의 그림 ‘기억의 고집’에 등장하는 녹아내리는 시계 소품은 직접적일 정도로 이 작업들이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지혜가 만들어 낸 이미지들은 희미한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사성은 이미지들을 통해 어렵게 드러나며 그 의미는 이중 삼중적이다. 때문에 어떤 구체성을 가졌다기보다는 분위기를 환기하고 꿈과 현실 사이의 몽롱함, 즉 기억의 모호함에 바쳐진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인간의 기억, 혹은 정체성의 속성이기도 하다.

영화란 무엇일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청각적 경험이고 그를 통해 서사적 흐름을 읽는 것이지만 사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한 줄거리와 장면들만 몇 기억에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인생이 그렇듯이. 때문에 시간이 흘러 영화를 다시 보면 이게 내가 본 그 영화였던가 싶을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경험도 그렇다. 내가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세 살 쯤 되었을 때였다. 태어나 살던 곳이 아주 작은 섬이었기에 영화관이 있을 리 없었고 이, 삼년에 한번 쯤 섬들을 돌며 순회 상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여객선을 타고 들어와 뻘밭 빈터에 말뚝을 원형으로 세우고 빙 둘러 천을 둘러쳤다. 일종의 가설극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확성기에 대고 온 동네가 다 들리도록 선전을 했다. 오늘 밤 영화는 오늘 밤 영화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나오는 배우들 이름을 이야기해도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그들이 누구인지 알리는 없지만 열심히 떠들어 댔다. 관람료는 5원쯤이지만 마늘 다섯 개나 보리 한 되를 가져와도 된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가설극장 안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는 물론 아무 기억이 없고 바닥에 앉은 사람들을 비추는 달빛과 바람에 흔들리던 스크린이 기억난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끝나고 나면 뭔가를 부분적으로 기억할 뿐 남는 것은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 뿐이나 아닐까. 그러므로 영화는 환상이고 현실과 겹치면서 다른 환상으로 변화된다.

이지혜가 주목하는 지점이 그곳이다. 영화는 사라졌고 희미한 장면들만 남았다. 더구나 영화들은 치매와 기억에 관한 고통스럽고 현실감 있는 영화들이지만 장면들은 분위기만 풍길 뿐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 즉 커다란 파편인 영화를 더 잘게 쪼갠 파편의 파편인 장면들에 현실감이 사라진 소품들이 겹쳐 모호하고 몽롱한 장면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어디선본 것 같은 기시감을 풍긴다. 하지만 그 기시감은 사실이 아니다. 이지혜가 겨냥하는 지점이 그곳일 것이다. 기억과 인간의 정체성은 분리 불가능하다. 때문에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인지 안드로이드인지를 판별하는 방법으로 기억이 진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심문한다. 그렇다고 기억이인간은 아니다. 그것은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인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원론적이건 일원론 적이건 보다 복잡한 존재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을 스스로 재규정하는 존재’이다. 즉 불변이 아니라 가변적인 존재이고 역사적 존재란 의미이다.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바로 그 행위를 할 수 없도록 만든다, 자신을 객관화 하고, 어느 시공간에 존재하며, 스스로를 재규정할 수 없게 한다. 해서 시공은 뒤섞이고 존재의 규정은 모호하고 기억은 사라진다. 이지혜가 주로 사용하는 거울, 간유리, 영화 등이 바로 이것들을 상징한다. 간 유리는 마치 비교적 생생한 기억들과 그렇지 못한 기억들이 공존하는 장으로 작용한다. 앵무새, 시든 꽃, 손 바닥 등은 일부는 명료하고 나머지는 아득하다. 이에 대비해 갑작스레 붉은 배경으로 등장하는 선인장은 현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이 전시의 마지막 사진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거울에 비친 자신을 찍은 사진이다. 겹쳐 쓴 여러 개의 안경은 정체성의 모호함, 불안을 표현하는 소도구나 아닐까? 전시의 첫 시작의 거울 속의 사진이 전통적인 서양 초상처럼 얼굴의 3/4을 보여주는 안경 쓰지 않은 자화상이고, 마지막 사진은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두 사진 모두 전시에 출품된 사진들 중 가장 명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화와 뒤섞인 몽롱한 이미지들이 현실인지 맨눈으로 본 내가 현실인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삶이란 불안과 불확정의 연속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렇듯이. 내 할머니도 치매에 걸리셔서 한겨울 새벽에 집을 나가 텃밭을 헤매다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갑자기 잠이 깨어 밭일을 하러 가신 거나 아닐까 짐작한다. 더 나아가 호미를 들고 돌아가셨으리라고 상상하기까지 한다. 어쩌면 그것이 더 행복한 세상 버림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지혜의 사진은 사진, 영화, 기억, 정체성, 불안에 관한 개인적 이야기지만 결국 모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글도 마찬가지다. 이지혜의 사진에 관한 언술이라기보다도 내가 가진 노년의 불안과 기억에 대한 글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 글에 내가 쓴 영화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진짜일까? 기억 자체가 왜곡 된 것이나 아닐까? 이지혜의 작업들이 겨냥하는 지점도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그것 일 것이다. 관객들에게 사진들을 보면서 스스로 자신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질문해 보라는 것.

강 홍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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