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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삼중통역자》

《Park Rehyun Retrospective: Triple Interpreter》

  • 작가

    박래현

  •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덕수궁내

  • 기간

    2020-09-29 ~ 2021-01-03

  • 시간

    9:00 ~ 9:00

  • 연락처

    02-2022-0600

  • 홈페이지

    http://www.mmca.go.kr/

  • 초대일시

  • 관람료

    무료관람

갤러리 가기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은 20세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여성미술가 박래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을 2020년 9월 29일부터 2021년 1월 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에서 개최한다.
 
박래현(1920-1976)은 식민지시기 일본화를 수학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모색하였고,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할 수 있는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를 탐구한 미술가이다. 특히, 섬유예술이 막 싹트던 1960년대에 박래현이 선보인 태피스트리와 다양한 동판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1970년대에 선보인 판화 작업들은 20세기 한국 미술에서 선구적인 작업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박래현은 낯설다. 가부장제 시대는 ‘박래현’이라는 이름대신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화가 김기창의 아내’라는 수식을 부각시켰다. 이번 전시는 김기창의 아내가 아닌 예술가 박래현의 성과를 조명함으로써 그의 선구적 예술작업이 마땅히 누렸어야할 비평적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박래현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43년에 <단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한 새로운 동양화풍으로 1956년 대한미협과 국전에서 <이른 아침>, <노점>으로 대통령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추상화의 물결이 일자 김기창과 함께 동양화의 추상을 이끌었고,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방문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뉴욕에 정착하여 판화와 태피스트리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7년 만에 귀국하여 개최한 1974년 귀국판화전은 한국미술계에 놀라움을 선사했으나, 1976년 1월 간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함으로써 대중적으로 제대로 이해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전시명인 ‘삼중통역자’는 박래현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표현한 명칭이다. 미국 여행에서 박래현은 여행가이드의 영어를 해석하여 다시 구화와 몸짓으로 김기창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여행에 동행한 수필가 모윤숙이 그 모습에 관심을 보이자 박래현은 자신이 ‘삼중통역자와 같다’고 표현했다. 박래현이 말한 ‘삼중통역자’는 영어, 한국어, 구화(구어)를 넘나드는 언어 통역을 의미하지만, 이번 전시에서의 ‘삼중통역’은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를 넘나들며 연결지었던 그의 예술 세계로 의미를 확장하였다.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은 완벽한 기술 습득을 통해 다양한 표현을 구사했으며, 마침내 기술을 초월하여 하나의 예술로 통합시킨 박래현의 도전을 따라, 1부 한국화의 ‘현대’, 2부 여성과 ‘생활’, 3부 세계여행과 ‘추상’, 4부 판화와 ‘기술’로 구성된다.

1부 한국화의 ‘현대’에서는 박래현이 일본에서 배운 일본화를 버리고, 수묵과 담채로 당대의 미의식을 구현한 ‘현대 한국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한다. 조선미전 총독상 수상작 <단장>,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수상작 <이른 아침>,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 <노점>이 한자리에서 공개된다.
 
2부 여성과 ‘생활’에서는 화가 김기창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로 살았던 박래현이 예술과 생활의 조화를 어떻게 모색했는지 살펴본다. 『여원』, 『주간여성』등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지에 실린 박래현의 수필들이 전시되어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고민했던 박래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3부 세계 여행과 ‘추상’은 세계를 여행하고 이국 문화를 체험한 뒤 완성해 나간 독자적인 추상화의 성격을 탐구한다. 1960년대 세계 여행을 다니며 박물관의 고대 유물들을 그린 스케치북들을 통해 박래현의 독자적인 추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함께 추적해볼 것이다.
 
4부 판화와 ‘기술’에서는 판화와 태피스트리의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동양화의 표현영역을 확장하고자 한 박래현의 마지막 도전을 조명한다. 박래현이 타계하기 직전에 남긴 동양화 다섯 작품이 한자리에 함께 공개되며, 판화와 동양화를 결합하고자 했던 박래현이 제시한 새로운 동양화를 감상할 수 있다.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은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연구사의 설명으로 10월 8일(목) 오후 4시 약 40분간 유튜브에서도 중계된다. 또한, 덕수궁관 전시 종료 후 내년 1월 26일부터 5월 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순회 개최예정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오랫동안 박래현의 작품을 비장(秘藏)했던 소장가들의 적극적 협력으로 평소 보기 어려웠던 작품들이 대거 전시장으로 ‘외출’했다”며, “열악했던 여성 미술계에서 선구자로서의 빛나는 업적을 남긴 박래현 예술의 실체를 조명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 4개관(서울, 과천, 덕수궁, 청주)이 9월 29일부터 재개관하며, 미술관 누리집(mmca.go.kr)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무료 관람할 수 있다.


■ 작가소개

□ 박래현(朴崍賢, 1920-1976)

192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부유한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났다. 여섯 살 되던 해 가족이 군산으로 이주하여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사범학교 에 진학한 뒤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 1939년 도쿄로 건너가 이듬해 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에 입학하였다.
4학년 재학 중에 <단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 하였고, 시상식을 위해 귀국했다가 김기창을 만나 1947년 결혼했다. 이후 박래현은 1948년부터 1971년까지 김기창과 12회의 부부전을 개최하였고 김기창을 비롯한 중진 동양화가들과 백양회를 결성하여 동양화단을 이끌었다. 1956년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노점>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해외를 여행하며 시야를 넓히고 추상화로 작품을 전향하였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미국에 남아 판화를 배웠고, 1974년 귀국하여 판화전을 개최하며 판화가로 변신하였다. 같은 해에는 훌륭한 예술가이자 모범적인 여성에게 주는 신사임당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다시 동양화 작업을 재개하고 미국의 판화전에 참석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을 펼쳤으나 갑작스럽게 간암이 발병하여 1976년 1월 타계하였다. 타계 후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우향 박래현초대유작전》 개최와 함께 박래현의 화문집(畵文集) 『사랑과 빛의 메아리』가 발간되었고, 1985년에는 중앙갤러리에서 《박내현 예술세계 10주기 회고전》이 열렸다.
 
□ 연보
1920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
1940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
1943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단장>으로 특선(총독상)
1946 첫 개인전 개최
1947 김기창과 결혼
1948 첫 부부전 개최, 이후 1971년까지 총 12회의 부부전 개최
1956 《제8회 대한미협전》에서 <이른 아침>으로 대통령상 수상
       《제5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노점>으로 대통령상 수상
1960-61 첫 해외여행. 타이완, 홍콩, 일본에서 열린 백양회 해외 순회전 참가
1964-65 하와이, 뉴욕, 워싱턴에서 부부전 개최, 김기창과 세계 여행
1967 《제9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선정, 김기창과 중남미 여행
1969-73 뉴욕에 체류하며 판화 연구
1974 7년 만에 귀국. 두 번째 개인전이자 귀국 기념전으로 《박래현판화전》 개최
       신사임당상 수상
1976 1월 간암으로 타계
 
■ 전시 구성 및 주요 작품 소개
 
1부. 한국화의 ‘현대’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박래현은 일본에 건너가 일본화를 배웠다. 유학을 마치고 해방을 맞이한 박래현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일본화의 자취를 지워내고, 관념적인 전통회화를 답습하지 않으며, ‘현대’에 어울리는 ‘한국화’를 창작하는 것이었다.
박래현은 1950년대 한국에 유입되는 서양화의 물결을 참고하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고민하며 하나씩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였다. 1956년 대한미협전과 국전에서 연이어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정상에 선 박래현은 화가로서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단장>, 1943, 종이에 채색, 131×154.7cm, 개인 소장

박래현이 도쿄 여자미술학교 3학년이던 1943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 박래현이 거주하던 하숙집의 딸을 모델로 하였다.
‘거울을 보는 여성’이라는 소재는 일본 미인도에서 즐겨 다루어지던 것인데, 박래현은 일본화를 학습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소재를 접했을 것이다. 박래현은 배경이 없는 큰 화면에 검은 옷의 소녀와 붉은 화장대만 마주 보도록 대담하게 구성하면서도 화장대 위의 화장솔과 소녀의 손에서는 섬세한 세부묘사를 놓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인물화에서 탄탄한 기초를 쌓은 박래현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이한 박래현은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여성 인물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노점>, 1956, 종이에 채색, 267×21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56년 1월 박래현은 막내딸을 출산하고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5월에 김기창과 나란히 부부전을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화풍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한 달 뒤엔 6월에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노점>은 같은 해 11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박래현은 한국전쟁시기 군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입체주의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화풍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장을 오가며 마주친 평범한 풍경을 그렸지만 담채의 맑은 색상,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색면, 예리한 필선에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긴다. 평소 생활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색상의 배합에 예민한 감각을 집중했던 여성화가 박래현의 성향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2부. 예술과 ‘생활’
 
박래현은 가사에 쫓겨 작품제작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을 ‘예술가라 할 수 있는가’ 라며 번민했다. 그는 남편과 작업실을 나누어 쓰고 시간을 쪼개어가며 작품을 제작했고, 부부전과 백양회 회원전을 중심으로 의욕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여성들의 선망이 될수록, 사람들은 그를 ‘김기창의 아내’, ‘김기창과 같은 길을 가는 부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박래현은 가사의 굴레와 김기창의 그늘에 갇히지 않고, 생활 속에서 예술의 주제, 재료, 기법을 찾아내며 새로운 동양화를 탐구했다.
 

김기창, 박래현, <봄C>, 1956년경, 종이에 채색, 167×248cm, 아라리오컬렉션
 
김기창과 박래현은 거의 매년 부부전을 함께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많은 수의 합작도를 제작하였다. 대부분 소품으로 그린 화조화인데 비해, 4폭의 연폭병풍에 그린 이 작품은 보기 드문 큰 규모의 합작도이다. 많은 수의 합작도가 전해지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예술가 부부’로서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던 이들의 그림이 인기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956년은 박래현과 김기창이 입체주의를 수용한 새로운 양식의 동양화를 선보이면서 화단에 큰 획을 그었던 해이다. <봄C>는 박래현이 먼저 등나무를 그린 뒤 김기창이 참새를 그리고 글을 썼다. 오래된 등나무의 둥치를 표현한 박래현의 힘찬 붓질은 기량이 무르익은 화가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그린 후 박래현은 연이어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3부. 세계 여행과 ‘추상’

1960년 박래현은 처음으로 해외를 방문했다. 대만, 홍콩, 일본을 돌면서 추상화의 물결을 확인한 뒤 본격적으로 추상화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세계무대로 눈을 돌렸다. 1964년과 1965년에 미국 순회 부부전을 열고, 미국, 유럽, 아프리카를 돌면서 서구 미술과 세계 문명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해외 박물관의 고대 유물에서 수공의 아름다움과 토속적인 멋을 발견하였고, 찬란한 황금빛 유물과 전통 가면을 재해석하여 구불거리는 황색 띠로 가득 찬 새로운 추상화를 탄생시켰다.
 


<잊혀진 역사 중에서>, 1963, 종이에 채색, 140.7×135.5cm, 개인 소장
 
1963년 일곱 번째 부부전이 열렸을 때 박래현은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등 강렬한 색채가 한지에 흠뻑 스미고 번져나가는 형상을 표현한 작품 11점을 출품했다.
이 작품들은 <잊혀진 역사 중에서>라는 단일한 제목으로 전시되었는데, 이 작품들에 대하여 박래현은 역사 이야기에서 색과 이미지를 찾아 환상적으로 표현한 추상회화라고 설명하였다. 서로 다른 원형들이 검은 선으로 연결되고 서로 다른 색채가 한지에 흠뻑 스미고 번지면서 섞이는 모습을 통해 역사를 형상화하였다. 이듬해 박래현은 로 제목을 바꾸어 미국 순회 부부전에도 출품했다.
박래현은 이 작품에서 물감을 흘리고 뒤섞고 흩뿌리는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면서 시대와 역사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함과 동시에 작가 특유의 세련된 조형 감각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
 

<영광>, 1966-67, 종이에 채색, 134x16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래현과 김기창은 1964년과 1965년 하와이, 뉴욕, 워싱턴에서 미국 순회 부부전을 개최하였고, 미국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보고 각지의 명소와 풍물을 답사하였다. 뒤이어 파리, 이탈리아, 이집트, 인도 등지를 여행하고 귀국했다. 긴 여행은 박래현의 작품 세계를 180도 바꾸어 놓았다.
박래현은 이듬해인 1966년 부부전에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추상화 연작을 발표했다. 구불거리는 노란색 띠가 가득 차 있으며 그 사이를 붉은색과 검정색이 메우고 있는 새로운 추상이었다. 이듬해 박래현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글에서 “태양의 생활력을 등황색으로,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짙은 붉은색으로, 타산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신중성을 검은색으로 표현하였다”고 했다.
<영광>은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출품한 것이다. 이 작품은 한지를 구기고 먹물을 묻히고 두드리고 찍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얼핏 투박해 보이지만 가까이에 다가가면 부드러운 화선지에 스미는 먹의 향연을 발견할 수 있다. 이국의 고대문명에서 발견한 생명력과 동양화 특유의 예민한 먹의 번짐 기법을 결합하여 완성한 박래현의 대표적인 추상화이다.

 
4부. 판화와 ‘기술’

1967년 박래현은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하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1974년까지 뉴욕에 체류하며 태피스트리와 판화를 연구했다. 그는 동판화의 기법을 하나씩 익히며 표현 방법을 확대해 나갔고, 정교한 기술을 모두 익힌 뒤에는 다시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진 작품을 선보였다.
귀국 후에는 동양화에 판화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작품을 제작했지만, 그녀의 실험은 갑작스러운 병마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 1970-73, 에칭, 애쿼틴트, 60.8×44cm, 개인 소장
 
박래현은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 후 김기창과 중남미를 여행하고 뉴욕에 머물며 미국 화단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판화 유학을 결심하였고, 결국 김기창 홀로 귀국했다.
박래현은 1969년-1970년 프랫 그래픽아트센터(Pratt Graphic Art Center)에서 판화를 연구한 뒤, 밥 블랙번 판화 공방(Bob Blackburn Workshop)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판화 작품을 제작하였다. 박래현은 주로 동판화 작업을 하며 에칭, 애쿼틴트, 콜라그래프 등의 여러 가지 기법을 한 작품에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이 작품에는 박래현의 관심사가 종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회탈과 신라 금 귀걸이, 자궁, 곡식 등의 이미지는 역사, 생명, 대지를 상징한다. 박래현은 동판을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동판마다 서로 다른 기법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새긴 뒤 판화지 위에서 이들을 결합하였다. 판면의 다채로운 이미지들은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통일되면서 묵직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작품>, 1970-1973, 태피스트리, 119.2 × 119 cm, 개인 소장
 
박래현은 미국을 방문한 후인 1966년부터 태피스트리를 제작하였는데, 이때에는 손으로 뜨개질을 해서 만든 직조에 엽전, 철사, 목재 등의 오브제를 연결하여 다양한 표현을 시도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박래현이 다시 태피스트리를 제작한 것은 미국에서 판화 유학을 하던 1970-73년 무렵이다. 이때에는 직조틀을 이용하면서 1미터가 넘는 방형의 직조물을 제작하고 여기에 커튼 고리, 하수구 마개 등의 오브제를 결합하여 다양한 조형 실험을 시도하였다. 아직 한국 공예계에서 섬유예술 분야가 자리잡기 전인 1960년대부터 박래현은 생활미술에 대한 관심을 태피스트리에 확장시키고 있었다.
 
※ 태피스트리는 본래 벽면이나 가구 등을 덮거나 장식하는 용도로 손이나 기계로 짠 직물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독일 바우하우스의 주요 작가들이 미국으로 활동을 옮기면서 회화적인 조형요소를 가진 태피스트리들이 순수한 조형예술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소수의 작가들에 의해 태피스트리가 전파되면서 점차적으로 대학 공예교육 수업에 도입되었다.



<어항>, 1975, 종이에 채색, 62.5×64cm, 개인 소장
 
박래현은 타계하기 일년 전, 판화기를 이용한 새로운 동양화 작업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두터운 흰 종이(장지) 위에 그림이 그려진 화선지를 판화기로 배접한 것이다. ‘친 콜레(chin colle)’라고 하는 동판화 기법을 회화에 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박래현이 귀국 후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갑자기 타계하자 김기창은 박래현이 ‘동양화와 판화를 결합한 새로운 회화’를 선보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애석해 했는데, 이 작품은 박래현이 펼쳐나가고자 했던 새로운 실험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김기창은 1975년 이른 봄, 밤을 새며 신들린 듯이 작품 제작에 몰두하던 박래현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녀가 죽음이 엄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린 작품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박래현이 미국에서 가지고 온 판화 장비와 도구들을 활용하여 실험적으로 제작한 동양화이며, 새로운 작품 세계에 대한 흥분과 기대로 밤을 새워가며 작품에 몰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항과 물고기는 박래현이 일찍부터 애정을 가지고 즐겨 다룬 단골 소재이다. 이 작품은 깊고 중후한 푸른빛과 그 위에 흩뿌려진 원색의 찬란함 때문에 생명의 환희가 가득 느껴진다. 새로운 기법을 가지고 시범적으로 제작한 이 작품에 이어서 박래현이 선보였을 동양화의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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