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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

Artists in Their Times: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Art

  • 작가

  •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주소

    경기 과천시 광명로 313 (막계동)

  • 기간

    2020-08-04 ~ 2022-07-31

  • 시간

    10:00 ~ 18:00

  • 연락처

    02-2188-6000

  • 홈페이지

    http://www.mmca.go.kr

  • 초대일시

  • 관람료

    무료관람

갤러리 가기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은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전 을 2020년 8월 4일(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근현대미술 120년의 주요 흐름을 미술관 소장품 중심으로 살펴보는 상설 전시로 주요 소장품 300여 점과 미술연구센터 자료 200여 점이 전시된다. 미술관에서 출판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300』(2019) 및 출판 예정인 『한국미술 개론서』(2020)와 연계하여 우리 미술을 보다 쉽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시이다.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전시는 한국 미술의 흐름을 시대 사회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8명의 학예연구직들이 시기별 연구·협력하여 구성한 협업 전시로, 주요 작품과 해당 시기의 풍부한 자료들을 함께 선보여 작품을 둘러싼 시대 배경과 전개 상황도 살펴볼 수 있다.
 
한국미술은 20세기 초, ‘사실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서 출발하여 주관과 개성이 드러나는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변모하였다. 이어서 ‘어떤 것이 진정한 사실인가’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면서 실존적 경향의 작업들이 등장하였고 미술표현의 다양한 실험들도 이루어졌다. 이후에는 단색 경향의 추상 미술과 당대 현실을 읽어내는 민중 계열 작품의 상대적 구도가 나타났고, 점차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 탈중심화된 다원주의 경향의 미술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으론 전통 화단의 변모로써 한국화의 정체성 규명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분단, 4·19혁명, 서울 올림픽, 세계화 시기까지 한국 작가들은 역사적 질곡 속에서도 작품을 시대정신으로 심화시키려는 치열한 작가 의식을 보여주었다.
 
전시는 3층(5, 6전시실)에서 1900-1970년대의 미술이 전개되며, 2층(3, 4전시실)과 회랑을 따라 197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의 미술이 연결된다. 관람객은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사회적 상황 속에서 미술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사회와 미술의 유기적 관계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또한 시간 여행을 하듯 시대별로 미술 매체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020년 대표적인 신소장품으로 가로 21.7미터 비단 화폭에 관동팔경을 담은 이용우의 <강산무진도>(1947), 김규진의 모본을 토대로 장인들이 자수를 한 <자수매화병풍>(19세기말-20세기 초) 등이 처음 공개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미술관은 그간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과 아카이브를 수집, 보존해 왔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 미술에 대한 시대의 눈을 싹 틔우고 한국근현대미술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mmc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섹션별 설명

20세기 전반 한국미술(1-3)
 
190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20세기 전반, 한국의 역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기였다. 쇄국을 고집하며 전통을 유지하려던 위정척사파와 외국의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계몽의 선두에 섰던 개화파 사이의 갈등이 20세기의 서두를 열었다면, 결국 이 갈등은 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국권을 빼앗기는 치욕으로 종결되었다.
일제의 강력한 무단통치 기간 동안 대부분의 문화 활동이 중단되었던 한편, 삼일운동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도된 미술전람회가 처음 개최되는 등 이른바 ‘문화통치’의 시대가 열렸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중 한국의 예술가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술 교육을 받고 활동을 펼치던 시기는 바로 1920년대부터 1930년대의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 악명 높은 군국주의 시대를 거쳐 1945년 해방을 맞았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5년간 극렬한 좌우 갈등의 혼란기를 맞았다. 그리고는 냉전 시대를 여는 세계사의 중대한 사건,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와 같은 대혼란기 속에서도 한국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예술가의 길을 택했다. 이들에게 ‘고난을 딛고도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그들은 ‘예술’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헤쳐나갈 용기와 저항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야기와 이들이 남긴 소중한 작품들이 이번 전시의 첫 번째 공간에서 펼쳐진다.


1. 전통미술의 변화와 유화의 도입(1900년대 초)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중인층 직업 화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궁에 속해 있거나 고위층의 미술품 수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고종황제의 초상을 제작한 어진화가 채용신 또한 그러한 전통미술가의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동시에 채용신은 일종의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자체 공방을 만들어 새로운 미술 수요층에 부응하기도 했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 후 낙향하여 주로 위정척사파 거두들의 초상화를 사진과 같은 기법으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려 명성을 떨쳤다. 전통미술은 그 제작 방식과 유통 구조에 있어 점차적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또한, 안중식, 김규진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개화된’ 화가들도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미술학교와도 같은 서화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전통과 근대의 기로에서 오래된 가치와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 나갔다.
한편, 중인 출신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했던 고희동은 일찍이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서 유화를 처음으로 배운 한국인이 되었다. 그가 다닌 도쿄미술학교는 졸업 작품으로 ‘자화상’을 제출하도록 했는데, 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이를 표현하는 ‘자화상’이라는 장르는 전통미술의 개념으로 볼 때는 생소한 것이었다. 화가의 지위와 역할에 총체적인 의식 변화가 일어났다. 주로 도쿄에서 유학했던 1세대 유화가들은 자화상뿐 아니라 누드화, 풍경화 등 서양미술의 새로운 장르를 연구하고 수입했다.


채용신, <전우 초상>, 1911, 65.8×45.5cm, 종이에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2. 관전(官展)미술과 새로운 표현의 출현(1920–194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삼일운동이 일어난 후, 1920년대 문예계의 지형도는 큰 변화를 맞았다. 일명 ‘문화통치’로 전환한 일제는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설하여 매년 총독부 주도의 미술 전시를 열었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한국의 미술가들은 이 전시를 ‘총독부전람회’라고 폄하하면서, 서화협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인 주도의 ‘서화협회전’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는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화가의 길을 유지하고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의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야심 찬 크기의 ‘전시용’ 작품들이 제작되었고, 일명 ‘선전 스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천편일률적인 양식과 소재의 작품들에서 점차 탈피하여, 예술가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양화의 경우, 당시의 ‘아카데미즘’에 해당하던 ‘인상주의’ 뿐 아니라, 야수파와 초현실주의, 추상의 요소가 접목된 작품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회화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화가의 ‘주관’과 ‘개성’을 드러낸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다양한 미술 양식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이인성, <카이유>, 1932, 72.5×53.5cm, 종이에 수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3. 해방과 전후(戰後) 미술(1940–1950년대)
 
1945년 8월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새로운 이념 분쟁 및 사회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한 사회 상황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1945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5년간의 시기에 제작된 미술 작품의 수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이 시기 작품은 한편으로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과 다른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절망을 동시에 내포한다.
한편,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이후 북한에서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기조를 이루었다면, 남한에서는 미국과 유럽의 서구미술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전후(戰後)의 참상과 현실을 기록한 역사적 작품들에 이어서, 김환기, 유영국 등으로 대표되는 ‘추상’이 한국적 서정에 바탕을 두고 한국의 산하(山河)를 소재로 꽃피기 시작했다.


이용우, <강산무진도>, 1947, 34×2169cm, 족자: 43.3×2259.5cm, 비단에 수묵담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4. 현대미술의 서막, 앵포르멜(1960년대)
 
한국전쟁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였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미술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국가 주도 전람회(대한민국미술전람회, 약칭 국전)에 반하는 여러 미술 그룹들이 발족하였고 재야전의 성격을 띤 초대전이 지속되면서 현대미술 움직임이 확대되었다. 한 예로,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던 그해 국전이 개최되던 덕수궁 외벽에 작가 그룹들이 서쪽 담과 북쪽 담으로 나누어 커다란 추상 작품들을 내건 가두 전시를 열기도 했다. 이것은 보수적인 기성 미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사건화하여 대중에게 호소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이 시기 작가들은 작품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심화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시대적 긴장과 갈등의 산물로 실존적 성찰의 의미가 있는, 세계 2차 대전 후의 유럽 미술인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회화에서는 작가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강한 붓 터치와 물질감 있는 작품들이 나타났고, 조각에서는 새로운 재료, 철이라는 현대문명의 물질과 용접의 흔적을 통해 인간 행위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동양화에서도 현대성을 확보하기 위해 붓의 운용과 먹의 효과가 중요시되는 추상 작품이 제작되는 등 미술계에서 전위의식이 확산되었다.
또한 작가들은 비엔날레를 비롯한 각종 국제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국제 미술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우리의 현실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이 시기 미술은 시대정신과 밀착된 조형운동으로서 체제 저항적인 성격을 띠며 국제 미술계와 조응하여 변화를 추구해 나갔다.
 

김형대, <환원 B>, 1961, 162×112cm,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5. 미술 표현 양식의 다양한 실험들(1960–1970년대)
 
일상의 사물, 이른바 오브제의 도입에서부터 설치와 행위 등의 새로운 방법론, 또 사진과 영상이라는 신매체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공교롭게도 1960–1970년대 한국의 미술에서 돌이 굴러가는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미술 표현 양식에 관해 매우 다채로운 실험들과 마주치게 된다.
당시의 세계는 히피와 대항문화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베트남전과 같이 차갑고 냉엄한 국제 정세의 살풍경이 엇갈리며 소용돌이치는 격동기를 지나고 있었다. 한국 역시 권위주의 정치체제 아래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 등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한편, 4·19혁명 등 민주화와 자유에 대한 갈망이 끊임없이 분출되던 역동의 시기를 관통했다.
비록 ‘조국 근대화’나 안보를 우선시하였던 분위기가 사회를 전반적으로 억압했던 속에서도 비판적 개인의 자유를 견지하려는 고군분투는 끊임없이 되살아나곤 했다. 미술 표현 양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권위적이고 구태의연한 사회문화를 돌파하려는 시도 역시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는 당시 청년문화를 배경으로 계속하여 이어졌다. 물론 이런 실험들이 여러 사회적인 여건들로 인해 탄탄하고 장기적인 지속성을 담보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으나, 미술 개념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점이나,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하려 시도했던 점 등은 한국현대미술 생태계의 종 다양성을 건강하게 이끄는데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후대 세대의 작품들에서 다양한 연결을 기반으로 한 작업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의 선구적 시도와 사례들이다. 따라서 향후 동시대 미술이 다채롭게 꽃피기 위한 자양분이 되어주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에 관한 재평가와 재발견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김구림, < 1/24초의 의미 >, 1969,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10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6. 1970년대 단색조 경향의 작품들(1970년대)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민족 전통의 부활과 재건을 강조하는 여러 문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고 정신성을 강조하는 한국적 미의식이 한국미술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이는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한국미술의 정체성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1970년대 초 «앙데팡당»전과 개인전 등을 시작으로 «에꼴 드 서울», 서울현대미술제 등의
초대전이 매년 개최되면서 1970년대 후반기는 모노크롬 경향의 작품들이 크게 부상하였다. 이는 한국 미술계에 집단화되어 나타난 단색조 계열의 작품들로 행위의 반복과 재료의 물성이라는 특징을 수반하였다. 회화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변화가 이루어져 화면은 무언가를 재현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존재를 드러내는 장으로서 표현이 최소화되어 나타났다.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일본에서의 관심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키우는 주요한 매개체로서 작용하였다. 1975년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전을 시작으로 이후 10여 년간 주요 미술관 전시 외에도 개인전, 소그룹전 등 일본 전역에 걸쳐 한국미술 전시가 개최되었다. 백색의 모노크롬은 일본에서 처음 언급되기 시작하여 한국 고유의 정서와 연계되면서 한국미술의 정체성 논의로 확장되었다. 이 경향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국내외 담론들을 통해 서구 미술 및 일본 미술과의 연결성에서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박서보, <묘법 No.16-78-81>, 1981, 130×162cm, 면천에 유채, 흑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7. 새로운 형상 회화의 등장, 한국 극사실회화(1970년대 후반–1980년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이르는 시기, 한국현대미술의 주요한 장면 중 하나는 형상과 표현을 중시하고 사회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리얼리즘 미술과 형상회화의 부상이다. 이 중 새로운 형상회화는 1970년대 후반, 극도의 수공적 노력을 통한 대상의 치밀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극사실회화에서 우선적으로 나타났다. 한국 극사실회화는 국전 중심의 아카데미즘 재현회화에 대한 회의와 거부, 당시 국내 화단에 자리잡았던 단색조 회화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으며 형상의 복원과 이야기/서술성의 회복을 꾀하고 있었다.
극사실회화를 주도한 젊은 작가들은 «전후 세대의 사실주의란», «형상 78», «사실과 현실», «시각의 메시지» 등의 소그룹전에 참여하면서 현대생활의 단면, 도시 환경, 자연물 및 인공사물 등을 작품의 주제로 끌어들였다. 당시 극사실회화는 1970년대 말에 부상한 민전의 수상을 휩쓸며 미술계의 표면으로 떠올랐고,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제1회 «청년작가전»에서도 김창영, 주태석, 지석철 등의 극사실회화가 새로운 경향으로 주목을 받았다.
주태석의 철길, 김강용의 시멘트 벽돌, 김창영의 모래밭, 지석철의 소파 쿠션, 이석주의 벽, 고영훈의 돌 등과 같이 한국 극사실회화는 자연 및 인공의 소재를 극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대상을 부각시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자연 풍광을 화면 위에 펼쳐놓거나 대상을 반복적으로 쌓음으로써 공간적 깊이감이 제거된 전면 회화를 보여주었는데, 구상과 추상, 일루전과 평면이 교차하는 이중 구조는 한국 극사실회화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영훈, <돌>, 1985, 142×98cm, 종이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8. 1980년대 이후 한국화(1980년대 이후)
 
1980년대 지필묵을 사용하는 전통 화단에 가장 큰 변화는 본격적으로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거나 기법을 전환하는 등 현대미술 장르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자 정체성 규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전통 화단에 추상성이 도입된 것은 1960년대 묵림회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서구의 조형성을 받아들여 동양화의 변화를 꾀한 바 있다. 이후 1980년대 전반은 수묵화 운동이 일어나 수묵화의 붐이 일었다. 이들은 추상성이 서양의 전유물이 아님을 역설하고 문인화적인 정신적 영역을 강조하면서도 먹의 물질적 성격을 부각하여 수묵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실경을 재현한 산수 풍경화가 제작되어 수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1984년 박생광전의 영향으로 수묵이 지배하던 화단이 채색으로 변모하였다. 왜색이 아닌 한국적 색채가 무엇인지 채색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박생광이 민족적 소재를 강렬한 채색으로 제작했다면 1980년대 후반에는 민화적 표현에 관심을 두고 일상적 감정에 솔직하고 해학적인, 채색화와 수묵화의 변주를 보여주었다. 또한 다양한 재료를 실험함으로써 지필묵의 경계를 확장하고 평면성을 넘어서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화에서는 점차 일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수묵을 표현 매체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신 대 물질, 수묵 대 채색이라는 이분화된 가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국화단은 전통 계승의 과제와 함께 현주소를 진단하며 새로운 조형 언어를 추구하고 있다.


송수남, <나무>, 1985, 94×138cm, 종이에 수묵,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9. 민중미술(1980년대)
 
민중미술은 한국 최초의 대대적인 자생적 미술운동으로 종래의 한국미술과는 달리 현실에 주목하고 내용과 서사 중심의 미술을 전개했다. 민중미술운동을 대표하는 1979년 현실과 발언,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등의 결성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치며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이후 임술년(1982), 두렁(1983) 등의 소집단들이 형성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민중미술이 80년대 한국미술을 대표하게 된 데는 한국의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는데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상징되는 폭압적인 신군부에 대한 저항과 전통적 우방으로 여기던 미국에 대한 다시 보기 등이 당시의 한국 사회 전체로 확산되며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미술도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민중미술을 태동시켰다. 여기에 더해 1970년대 한국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단색조 경향의 작품들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형상미술에의 추구(극사실)는 사물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통해 현실에 대한 관심의 단면을 노출함으로써 민중미술이 등장하는데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민중미술은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 현장의 대형 걸개그림과 출판물의 삽화로 사용된 목판화 등 민중과 함께하는 미술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만화, 광고 등 대중적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사진, 콜라주 등을 통해 이미지를 조합하는 등의 다양한 전개를 보여주었다.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냉전 분위기의 와해와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운동으로서의 성격은 약화되며 전반적인 퇴조 양상을 보였고,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 15년»전 이후 제도권 미술에 편입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신학철, < 묵시 802 >, 1980, 60.6×80.3cm, 캔버스에 콜라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0. 1980년대 다양한 소그룹 활동(1980년대)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격변의 시기였다. 신군부의 탄압에 맞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크고 작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고,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룩하며 사람들의 일상 또한 급변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80년대 미술계는 단색조 회화와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민중미술이라는 양축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1980년대 초반에 미술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은 양쪽 중 한 노선을 선택하기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거대한 흐름에 편입하기보다는 특정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개별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학교를 중심으로 소그룹을 창설하여 자유롭게 활동했다.
본 전시에서는 당시 주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했던 타라, '82 현대회화, 난지도, 메타복스, 로고스와 파토스, 3월의 서울, 레알리떼 서울, 뮤지엄 등 총 8개 그룹의 활동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획일적인 양식을 거부하고 당시 미술계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전략을 취하면서 신형상 회화,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 물질성을 강조하는 설치 작업에 주력했다. 별도의 기획자 없이 작가들 스스로 전시를 기획하거나 서로 연대하여 연합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그룹들은 같은 시기에 서로 비슷한 의식을 가진 작가들이 모여 함께 작업했을뿐 뚜렷한 하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그룹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소그룹이 기존 미술과의 단절과 새로움을 주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안주와 타성을 경계하여 활동 기간을 길게 지속하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한 그룹에만 머무르지 않고 여러 그룹을 배회하며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소그룹의 활동은 당시 시차 없이 유입되던 서양 미술의 사조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미술의 발전 방향을 자체적으로 모색하고자 했던 실천에 그 의의가 있다.
 

신영성, <코리안 드림>, 1986-2002, 40×31×10×(65), 벽걸이 선풍기 65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90년대 이후 한국미술(11-15)
 
1990년대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은 약화되고 환경, 젠더 등의 개념이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지목되었다. 세계화 속에서 인구이동 현상이 늘어나고 정보산업이 발달하면서 인터넷 등 통신 시스템이 가속화되었다. 대중소비사회가 정착되면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탈중심화 된 문화양식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다원주의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에서 하나의 시대적 담론이자 비평적 언어가 되었다.
한국현대미술에 나타난 다원주의적 경향을 이번 전시에서는 ‘세계화의 시작’, ‘개념적 태도’, ‘비판적 현실인식’, ‘일상과 대중문화’, ‘다원예술과 표현의 확장’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주가 빈번해지고 비엔날레 한국관이 설립되는 등 한국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부상하게 되는 ‘세계화의 시작’,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과정이나 상황, 개념이 작품에 중시되는 ‘개념적 태도’, 주변의 다양한 문제들, 환경, 도시 개발, 소수자 등을 바라보는 ‘비판적 현실 인식’, 대중매체에서의 다양한 이미지 차용을 보여주는 ‘일상과 대중문화’, 미술, 무용, 연극, 음악, 영화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원예술과 표현의 확장’ 등이다.


11. 세계화의 시작(1990년대 이후)
 
1980년대 말, 냉전 시대가 종결되면서 전 세계는 다원화 시대에 진입하였다. 국내에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1993년 대전 엑스포 등의 대규모 국제 행사를 개최하여 국가 위상이 높아졌고,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의 주요한 국정과제로 ‘세계화’를 내세웠다. 이러한 세계화 정책이 맞물리면서 미술 분야의 국제 교류 또한 증가하기 시작했다. 국제적 상호 교류와 함께 서구의 최신 담론과 미술 경향을 소개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자연스레 국가의 경계를 넘어 활동하는 작가들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90년대 초 국제미술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남준을 비롯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강익중, 박이소 등이 그 대표적인 작가들로, 이들은 한국적 소재나 전통적인 모티프를 재해석하는 작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미술의 해’로 지정된 1995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건립, 광주비엔날레를 창설하여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비엔날레에서 탈중심화, 다원화 등이 주요 이슈로 등장하고 비서구권 작가들에 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적, 동양적 요소를 대형설치, 영상 작업으로 풀어낸 전수천, 김수자 등이 여러 국제전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이처럼 1990년대 초반 한국 미술계는 세계화라는 국가적 정책과 그에 부합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국제 미술계의 주변부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서구의 미술 경향과 최신 담론을 우리 것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비평과 제도를 마련하지 못한 채, 해외 교류의 양적 팽창에만 주력한 한국미술의 세계화 전략은 일회성 행사로 끝나거나 국가 간의 경계와 차이를 재확인하는 한계점을 보였다.


백남준, <색동 I >, 1996, 117×169cm, 패널에 아크릴릭, TV모니터, VCR, VHS비디오 테잎,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2. 개념적 태도(1990년대 이후)
 
1990년대는 이전 시기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약화되고 다원화와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한국의 동시대 미술이 본격화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집단주의가 힘을 잃고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개인이 부상하고 일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이 시대 미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이 섹션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작가들 중 개념적 성격이 돋보이는 일군의 작가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각각의 개별성이 강한 만큼 하나의 경향으로 묶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들의 작업은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과정이나 상황, 그리고 작품의 개념을 이루는 언어의 역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개념적, 혹은 개념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민중미술의 거대 담론이나 집단주의와는 차별화된, 개인적이면서도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태도를 취했다. 형식적으로는 심미적 조형성을 의식적으로 억눌러 모더니즘 회화의 작가주의와도 결을 달리했다. 그 결과 일상적 사물과 상황을 소재로 삼아 사물의 정체성을 뒤바꾸어 사물과 그것을 규정짓는 언어 사이의 관계를 파고들거나, 행위나 대상들 간의 관계에 숨겨진 위계를 드러내는 등의 작업이 주를 이루었다. 관람객의 적극적인 사고를 유도하는 이러한 작업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상황들, 그리고 예술이라는 행위 자체를 대하는 시각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김범,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2002, 14×30×13cm, 23.5×13×13cm, 13×22.5×19cm, 혼합재료,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3. 비판적 현실인식(1990년대 말)
 
1990년대 말 한국 사회는 서구의 자본주의 문화의 직접적인 유입과 대중문화의 팽창 등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면서 민중미술에서 논의되었던 정치적 이슈들보다는 개인의 욕망과 정체성에 보다 집중하게 된다. 이는 특정 경향으로의 획일화보다는 주변의 다양한 문제들(여성, 환경, 섹슈얼리티 등)을 바라보게 만들었고 미술 역시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일부 작가들은 사회비판적, 실천적 미술에 관심을 가지며 민중미술 이후의 미술과 대중적 삶의 관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으며 이런 경향들이 민중미술의 일부 특징을 공유한다는 시각 때문에 ‘포스트 민중미술’이라는 용어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회비판적 미술을 민중미술처럼 특정한 경향성을 가진 하나의 흐름으로 묶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민중미술이 정치적 사건에 집중하고 재현하는 저항적, 투쟁적 미술이었다면 이 시기의 미술은 대중문화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이들이 처한 이중적인 상황을 드러내는 보다 자기성찰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습, <습이를 살려내라>, 2002/2012, 151×116cm, 디지털 크로모제닉 컬러 프린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4. 일상과 대중문화(2000년대 이후)
 
2000년대에 들어 일상을 다룬 작품이 부쩍 늘어난다. 미술가들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기보다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소재를 발견한다. 물론 그 이전에 일상을 다룬 작업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일부 작가들은 사회·정치적 이슈를 작품에서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또한 모더니즘의 피상적인 형식 탐구와도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즉 이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개인의 경험이나 소소한 일상에 관심을 기울인다. 더불어 미술가들은 그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관찰한다. 예전에는 산, 들, 강 같은 자연이 작품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도시의 건물과 도로,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작업의 소재가 된다.
한편, 2000년대는 대중·소비사회가 정착된 시기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음반 시장의 성장, 케이블 TV의 등장, 영화 산업의 발전, 패션의 유행 등이 나타나면서 대중문화가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미술가의 작업도 변모한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TV, 신문, 영화, 잡지 등 대중매체를 접하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다양한 이미지는 이미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미술가들은 넘쳐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임상빈, <덕수궁-서울>, 2009/2010, 137×63.5cm×(2), 137×86.5cm, 디지털 크로모제닉 컬러 프린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5. 다원예술과 표현의 확장(2000년대 중반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미술계에서는 ‘다원예술’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다원예술은 미술, 무용, 연극, 음악, 영화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말한다. 다분히 장르의 융합과 교차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단순히 장르의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장르가 장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그 장르만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생겼고, 그런 것들을 서로 공유한 결과 자연스럽게 독특한 형태의 예술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다원예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행사는 페스티벌 봄이었다. 2007년부터 매년 봄에 개최되었으며, 미술가를 비롯하여 안무가, 연극·영화 관계자, 이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상당수의 작업이 전시장이 아닌 공연장이나 야외에서 공연의 형태로 행해졌고, 관객들은 작업의 진행 과정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이 만나고, 다원예술이 활성화되면서, 미술가들은 안무가·무용가, 음악가 등과 협업을 자주 하게 된다. 그에 따라 미술 작품에 있어 ‘소리’와 ‘움직임’이 주요한 요소로 부상했으며, 비록 공연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몸의 움직임이라든가 소리의 비중이 높은
작업이 속속 등장한다.


정연두, <시네매지션>, 2010,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50분 31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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