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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공감 - 최달용의 서울살이

Generational Empathy-Life of Choi Dall-ryong in Seoul

  • 작가

  • 장소

    서울생활사박물관

  • 주소

    서울 노원구 동일로174길 27 (공릉동)

  • 기간

    2020-12-08 ~ 2021-03-28

  • 시간

    9:00 ~ 18:00 (휴관일 : 사전 예약제로 운영중 )

  • 연락처

    02-3399-2900

  • 홈페이지

    https://museum.seoul.go.kr/sulm/index.do

  • 초대일시

  • 관람료

    무료관람

갤러리 가기
아버지 세대 청년시절의 일상과 마주하는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 「세대 공감 - 최달용의 서울살이」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언제나 다른 시대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세대들이 공존하고 있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서울의 삶을 함께 기억하는 전시를 통해 꾸준히 세대가 소통하고 교감하는 세대 공감의 장이 되고자 한다. 20세기 후반 서울과 서울살이는 너무나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그 변화는 해방둥이 서울사람들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해방둥이들의 삶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이로운 성취를 이룬 한국사회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해방둥이 서울사람 최달용의 학교생활, 직장생활, 결혼생활 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록과 자료들을 통해 개인의 인생과 시대 상황이 맞닿아 있음을 확인하고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삶이 이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서울시민 최달용 씨가 기증한 자료들로 1950~70년대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
전시는 서울시민 최달용 씨의 기증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장부터 혼수용품, 변리사 자격증에 이르는 개인 자료 뿐 아니라 아이디어 제품들을 평생 성실히 모았다. 그 중 일부인 1,181건을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생활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번 전시는 최달용의 기증 자료 및 개인 소장 자료 90여점과 당시의 시대상을 담은 유물 80점을 함께 전시하였다. 청년 시절 최달용이 살아내었던 매일매일의 일상과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들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하여 이른바 ‘아버지 세대’의 청년 시절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로비 전시 공간에는 변리사 최달용이 평생 수집한 100여점의 아이디어 제품들을 전시하여 관람객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보는 산업화 세대, 그리고 공감
전시의 도입부에는 ‘그때의 청년이 지금의 청년과 마주하다’라는 영상이 상영되는데, 서울이라는 같은 공간 속에 다른 시대의 청년이 서로 마주보는 장면을 연출하여 세대 간의 공감을 이끈다. 이어지는 ‘사회학자의 서재’에서는 1950년대부터 70년대의 주요사건들을 유물과 함께 조망한다.
 
1950~70년대 서울
전쟁 직후의 서울은 어수선했다.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과 남·북한군 쌍방간 치열한 시가전으로 도심부는 폐허가 되었고, 행정력이 미비한 가운데 전재민과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형성된 무허가 불량주택들이 도시 곳곳에 누더기처럼 난립해 있었다. 4·19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로 바뀌면서 5·16이 들어설 자리가 만들어졌다. 군사정권은 무너진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면서 동시에 대중의 ‘빵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1960~70년대 한국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같은 시기 서울은 폭발적 인구성장과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했다. 해마다 늘어나는 무작정 상경한 농촌 인구에 전쟁 이후 베이비붐 현상으로 인한 자연증가가 더해져 1953년 100만 명 정도였던 서울의 인구는 1963년 300만 명을, 1970년 500만 명을, 1979년 800만 명을 돌파했다. 그 결과 서울은 각종 도시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등장한 이래, ‘두더지’ 양택식, ‘황야의 무법자’ 구자춘으로 이어지는 개발독재 시정기를 거치면서 서울의 도시경관은 급격히 변모해갔다.
 
해방둥이 서울사람 ‘최달용’의 삶_피난시절 셋방살이부터 변리사가 되기까지
최달용은 광화문 인근에서 2남 3녀 중에 넷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최달웅崔達雄이었으나 행정착오로 최달용崔達龍으로 호적에 이름이 잘못 등록되었음을 중학 입학서류 준비과정에서야 알게 된다. 5살 때 6·25가 일어났는데, 그는 전쟁을 느닷없는 쏟아지는 폭격의 공포와 시시때때로 울리는 사이렌 소리의 불안감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가족은 1950년 12월 경부선 열차에 올라타고 뒤늦은 피난을 떠났다. 종전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신당동의 어느 다세대 불량주택에서 십여 가구와 함께 살았다.
최달용은 국민학교 6학년인 1958년에 드디어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입시지옥’의 10대 학령기를 거쳤다. 가난한 가정 형편에도 불하지 않고 최달용은 학업을 마쳤고, 취업과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일궜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성장이 최우선 과제였던 1960~70년대 사람들은 정부 주도적인 ‘위로부터의 근대화’ 노선에 따라 배 곪지 않고 잘 살기 위해 밤낮 없이 일했다.
 
  •  공부해서 남주나
잘 살아보겠다는 열망은 높은 교육열로 발현되었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무너져버린 전통적인 반상班常과 문벌門閥의 신분 질서를 대체하여 등장한 가장 강력한 계층 상승 수단이었다. 특히 1968년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고,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정책이 시행되기 이전까지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출세와 성공을 위한 필수요건으로 여겨졌다. 어렵사리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입학금을 내지 못해 등록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부모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고학생苦學生들은 스스로 학비를 벌어 학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서울어린이, 1954년 / 금호초등학교 1회 졸업장, 1959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최달용 기증 ) / 중학입시 학력평가총정리, 1957년

• 잘 사는 일에 앞장서자
1960~70년대까지 대학의 수와 정원은 제한되었기에 대학생은 매우 드물었고, 사회에서 지성인으로 우대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진전되면서 고학력 인재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점점 늘어났고, 대학생의 취업률은 매우 높았다. 박정희 정권은 김일성 정권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주의적 총동원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피하기를 꿈꾸는 국민적 열망에 불을 당겼고, 대중은 정부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나섰다.

   
10월 유신 관련 표어, 1972년 /  중앙특허법률사무소 팸플릿, (1970년대, 최달용 소장)


• 안정된 삶, 가정을 이루다.
만혼晩婚과 비혼非婚이 드물지 않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몹시 낯설겠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시 가구의 절반 가량은 결혼 이후에도 부모를 모시고 사는 확대가족이 일반적이었다. 친족간 유대관계가 중시되는 농경사회의 전통은 도시화가 진전된 이후로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 접어들어 급속한 산업화로 고용의 기회가 확대되면서 차츰 자녀에 대한 부모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그들은 결혼의 시기와 배우자도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연애혼이 늘어나고, 결혼한 부부가 가정을 꾸리는 신거제新居制 형태가 보편화되면서 핵가족화도 진행되었다.

  
가정의례준칙 혼례괘도 표지와 내부, 1960년대 이후


• 변리사의 꿈을 이루다.
변리사는 현대의 과학기술혁명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직업군의 하나로, 아이디어나 기술 등의 지식재산을 특허권으로 만들어 보호받고 활용할 수 있도록 법적·기술적 상담과 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직종이다. 다년간 특허 관련 회사에 근무하면서 최달용은 여러 차례 변리사 시험에 도전한 끝에 37세에야 늦깎이로 합격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1999년 개인 사무소를 개업하여 20년째 회사를 키워오고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 세대’가 등장하듯 커다란 변혁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다. 지금의 서울에도 산업화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공존하고 있고, 그들의 세대 차이는 곧 공감과 소통으로 치환될 수 있음을 보여드리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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