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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그의 눈에 비친 미인, 당신이 보는 미인
  • 작성일2020/07/28 09:34
  • 조회 578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여성이 여성이기에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은 인류사에서 종종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덜했다. 그런 까닭에 신윤복의 ‘미인도’가 일찍이 주목을 받은 모양이다. 흔히 신윤복의 ‘미인도’를 조선 미인도 중 최고 걸작이라 말하지만 실상 조선의 미인도는 대개 작자 미상의 여인 그림 몇 점이 전부다.
신윤복 ‘미인도’, 18세기, 비단에 채색,114×45.5㎝, 간송미술관. ▲ 신윤복 ‘미인도’, 18세기, 비단에 채색,114×45.5㎝,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그녀는 새초롬한 얼굴로 오른편 아래를 내려다본다. 가늘고 섬세한 필치에서 마늘쪽 같은 코에 앵두 같은 입술의 앳된 모습이 더 돋보인다. 곱게 빗어 올린 삼단 같은 머리와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드리운 붉은 띠가 상당히 멋을 부린 차림새다. 소매가 좁고 꼭 끼는 삼회장저고리에 잡아맨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수줍은 어린 기녀다. 신윤복은 보는 이의 시선을 버선코로 이끈다. 푸른빛 치맛단 아래 삐죽이 내민 버선은 새침한 그녀의 도발이고 반항이다. 말갛고 투명해 보이는 그녀의 꾹꾹 눌러 둔 반항을 신윤복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보는 그녀의 내밀한 속내가 눈매와 버선발에서 드러나는 걸 보면 그와 그녀는 사적인 관계였던 듯하다. 드러낸 적 없던 조선의 여인이 처음 표현된 건 이처럼 개인적인 필터를 통해서였다.

윤두서의 ‘채애도’부터 여성 그림이 늘었다. 풍속적 요소를 반영한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좀더 초상화에 가까운 여성화가 그려진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서양화법이 가미된 채용신(1848~1941)의 ‘운낭자’는 여러 모로 ‘미인도’와 비교된다. 실제 초상화는 아니지만 얼굴이 훨씬 구체적이라 특정한 개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보인다.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은 매우 긍정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자세는 당당하다. 신윤복의 미인과 채용신의 운낭자는 치마저고리의 색도 비슷하고, 왼쪽 버선발을 슬며시 치마 밖에 내놓은 모습도 같다. 하지만 두 여인의 인상은 전혀 다르다. 화가의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채용신 ‘운낭자’, 1914, 비단에 채색, 120.5×61.7㎝, 국립중앙박물관. ▲ 채용신 ‘운낭자’, 1914, 비단에 채색, 120.5×61.7㎝, 국립중앙박물관.
고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한 바 있는 채용신은 세밀한 필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운낭자는 원래 가산군수 정시(1768~1811)의 첩실이던 기생 최연홍(1785~1846)의 별칭이다. 그녀가 27세 되던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정시가 살해되자 정시 부자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고 그 동생을 몰래 치료해 줬다. 이에 그녀의 행적을 가상히 여긴 조정에서 기생의 신분을 면해 주고, 사후에는 초상화를 그려 열녀각인 평양 의열사에 봉안했다. ‘순조실록’에서는 그녀를 ‘구국의 열녀’로 칭송했다.

채용신은 1914년 운낭자가 27세이던 때를 상상해 이 그림을 그렸다. 뒷면에 채색을 해 색이 배어 나오게 하는 배채법 등 전통 화법과 옷주름의 음영을 살린 입체감, 사진처럼 세밀한 묘사 등 서양화법을 접목해 초상화에 근대로 향하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 건강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기독교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을 떠올리게 한다. 신윤복의 그림이 기녀를 향한 내밀한 감상이라면 채용신의 그림은 심지 굳은 대중의 어머니와 같다. 같은 기녀임에도 개인의 은밀한 관찰과 사당에 걸기 위한 공적 인물 묘사는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았다. 분명 여성을 대하는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72803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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