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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모나리자는 왜 유명해졌을까? / 레오나르도 다 빈치_모나리자
  • 작성일2020/12/10 17:20
  • 조회 383
루브르박물관이 2018 러시아 월드컵 우승 직후 프랑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모나리자 합성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를 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작을 돌려달라는 서명 운동에 수십만 명이 서명하는 등 모나리자 반환을 둘러싼 갈등에 다시금 불을 지핀 것이다. 왜 피렌체 출신 화가의 명작이 프랑스에 자리 잡은 것일까?

예술을 사랑한 프랑스의 젊은 왕 프랑수아 1세가 후대에 남긴 큰 선물 중 하나는 다빈치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그를 초청한 일이다. 예순을 넘긴 다빈치는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작업 중이던 <모나리자>, <성 안나와 성모자>, <세례자 요한> 3개 작품을 들고 왔다. 그중 <모나리자>와 <성 안나와 성모자>는 영영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미완성으로 남은 <모나리자>는 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것일까? 다빈치가 말년에 프랑스로 이주하던 당시에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새로운 대세로 떠오르던 때였다. 게다가 다빈치는 예술 외에도 요리, 과학, 토목, 건축 등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한 천재로 평가받을 만큼 다른 방면에서 더욱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반대로 ‘화가로서의 역량도 당대 최고였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모나리자>, 1503,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의 값어치를 천정부지로 뛰게 만든 계기는 20세기 초에 발생했다. 이탈리아인 빈첸조 페루지아가 루브르 박물관에 폐장 시간까지 숨어 있다가 모나리자를 옷 속에 숨겨 훔쳐 나와 2년간 자기 집에 숨겨뒀던 첫 번째 절도 사건이다. 미술상을 통해 그림을 팔려다 덜미가 잡히면서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갔지만, 어떤 그림이기에 이탈리아인의 애국심에 불을 당겼는지 모두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훔쳐오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하는 그림 속 ‘신비로운 미소’는 이때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도 염산 테러를 당하거나, 큰 돌을 맞는 등 모나리자의 수난은 한동안 계속됐다. 도난 사건으로 시작된 유명세는 앤디 워홀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패러디 작품을 남기면서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그림 속 여인의 정체 역시 <모나리자>에 신비스러운 서사를 부여하면서 그 가치를 드높이는 데 기여했다. 피렌체의 권력가였던 조콘도의 아내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나폴리 왕의 손녀부터 레오나르도의 남성 제자, 다빈치의 여장한 모습 등 모델로 거론되는 이들은 무수히 많다. 게다가 당시 정면을 봐도 되는 여성은 이브나 성모 마리아 등 성경 속의 존재들뿐이었다는 데서도 엄청난 파격을 자랑한다. 더불어, 다빈치가 죽을 때까지 정체가 모호한 여인의 초상화를 화실에 걸어 두었다는 점 역시 미술계는 물론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작품 내부를 들여다보면 가장 큰 특징은 웃는 것 같으면서도 슬퍼 보이는 미소다. 거의 보이지 않는 눈썹과 함께 <모나리자>에서 가장 돋보이는 지점인데, 이는 사물의 윤곽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스푸마토(연기가 자욱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기법 덕택이다. 스푸마토 기법으로 눈과 입술의 윤곽을 모호하게 남겨 표정의 신비로움을 더한 것이다. 관람자가 슬프면 그림도 슬프게, 행복하면 그림도 행복해 보이는 이유다. 관찰자의 심리를 그대로 투영하는 미스테리한 그림이라는 스토리,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세 차례에 얽힌 수난사가 바로 모나리자를 다빈치 작품 중 가장 유명해진 핵심적인 원인들이었다.


<성 안나와 성모자>, 1502~1513, 레오나르도 다 빈치
 


(게재된 글은 백영주의 '세상을 읽어내는 화가들의 수다'에 수록되었으며 저작권은 백영주에게 있고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 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모나리자 미소가 사라지다' 동영상 보러가기 => 모나리자 미소가 사라지다!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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