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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아름다움’은 무죄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 장 레옹 제롬, 판사들 앞의 프리네
  • 작성일2020/12/0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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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레옹 제롬, 《판사들 앞의 프리네》(1861)
 

인간과 금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이성’(異性)을 기준으로 인간과 금수를 구분한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 금수에게는 이성이 없다. 따라서 인간은 금수보다 우월하다. 서양인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문명을 말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성을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것에 대해 판단할 때 이성적 논리에 의거하여 옳고 그름을 따진다. 이와 같은 생각은 현대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현대 인류의 문화적 조상인 그리스인들은 이성적이었는가? 그리고 우리도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이성적일까?

기원전 그리스의 법정. 판사들 앞에 한 명의 여자가 섰다. 이 여자의 이름은 프리네. 그녀는 당대 남성들과 학문에 대해 논할 수 있을 정도로 학식을 갖춘 고급창부, ‘헤타이라’였다. 또한 그리스 최고의 미인으로 칭송받았으며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여신 아프로디테의 모델이기도 했던 프리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법정에 섰을까? 그녀의 죄목은 다름 아닌 신성모독. ‘포세이돈 제례에서 나체로 바다에 들어갔다.’라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당시 신성모독은 사형이었다.

사형선고를 목전에 앞둔 순간, 프리네의 연인이자 유능한 웅변가였던 히페레이데스가 그녀의 옷을 순식간에 벗겨냈다. 여신과 비견될 만큼의 아름다움이 법정을 밝혔다. 히페레이데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다. ‘이것은 신적인 아름다움이다. 신성한 아름다움 앞에 인간의 법은 무효하다.’ 판사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장 레옹 제롬’의 《판사들 앞의 프리네》는 ‘프리네 일화’를 그려낸 회화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중요한 지점을 시사한다. 우선 작품부터 살펴보자.
히페레이데스는 의기양양하게 프리네의 옷을 들고 있다. 프리네는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있다. 판사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녀의 나체에 넋을 놓았다는 점. 판사들의 머릿속은 무죄라는 단어로 가득해진다. 시각에 의한 욕망이 인간의 이성을 압도한 순간이며 가히 관음증적인 순간이다. 그리하여 판사들은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프리네 일화의 판결은 이성적인 판단이었을까? 지금에 이르러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그릇된 판결로 평가한다. 죄의 유무를 차치하더라도 판사들의 판단은 합리적 과정을 거친 이성적 판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프리네 일화’와 장 레옹 제롬의 작품 《판사들 앞의 프리네》을 통해 우리가 그토록 믿었던 가치, 이성을 의심하게 된다. 의심은 비판으로 발전하고 이성에 대한 전면적 회의가 일어난다.
만약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 프리네 일화가 재현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녀를 무죄로 볼까? 아니면 유죄로 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 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나체에 주목할 것이다. 하룻밤 만에 가십거리가 되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까지도 인간의 이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사건의 선정성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성을 따져 봐야한다.

프리네 일화와 관련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가 고발당한 이유는 그녀가 그리스고관대작 에우티아스의 고백을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사실은 에우티아스가 프리네를 소유할 수 없어 신성모독을 죄목으로 고발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사건의 성격은 달라진다. 그녀는 신성을 모독한 범죄자일까? 아니면 남자를 거부한 이유만으로 모함당한 여자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사건과 사고가 범람하고 있다. 그만큼 시시비비를 따질 일이 많아졌다. 개인의 정보처리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이성적인 잣대로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최근 각종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칫 무고한 자에게 주홍글씨를 새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재판과 관련된 판단은 다른 무엇보다 법적원칙에 근거한 판결이 요구된다. 심판은 이성에 의해야하지 감성에 의해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불가능을 넘어서도록 노력할 때 위대해진다. 적어도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를 보더라도 이성적으로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혹여 21세기 대한민국의 프리네는 없는지 주의하자. 누구나 프리네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판사가 될 수 있다. 이때 배심원의 역할을 수행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금수보다 못한 놈이라는 말만큼 치욕스러운 말은 없다.


(게재된 글은 백영주의 '세상을 읽어내는 화가들의 수다'에 수록되었으며 저작권은 백영주에게 있고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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