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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손끝서 과학자 손길로… 아픈 곳 다듬는 수리수리 미술
  • 작성일2020/06/10 10:03
  • 조회 603
두 번 대수술 끝 살아난 이갑경 작가 ‘격자무늬 옷을 입은 여인’ 물감이 떨어져 나가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던 이갑경의 1937년작 ‘격자무늬 옷을 입은 여인’(왼쪽)은 1989년과 2014년 보존처리를 겪었다. 찢어진 캔버스를 복구하고 색을 얹는 정교한 작업 끝에 원형을 되찾았다(오른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두 번 대수술 끝 살아난 이갑경 작가 ‘격자무늬 옷을 입은 여인’
물감이 떨어져 나가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던 이갑경의 1937년작 ‘격자무늬 옷을 입은 여인’(왼쪽)은 1989년과 2014년 보존처리를 겪었다. 찢어진 캔버스를 복구하고 색을 얹는 정교한 작업 끝에 원형을 되찾았다(오른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술 작품은 예술가의 손끝에서 태어나지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건 과학자의 손길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충격에 의한 물리적 파손이든,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적인 노화 현상이든 상처나 질병 없는 작품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치료하고 보살피는 ‘미술품 의사’의 존재 역시 필연적이다.

미술계 전문 용어로 ‘보존과학자’(콘서베이터)가 그들이다.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 ‘인사동 스캔들’ 등 대중 매체에서 보존과학자가 매력적인 직업으로 등장한 적은 있으나 미술 전공자나 관계자가 아닌 일반 관람객에게 여전히 보존과학은 흥미롭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인공을 빛낸다는 점에서 무대로 치면 백스테이지에 해당하는 미술관 보존과학실을 엿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마련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보존과학자 C의 하루’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보존과학의 내막을 속속들이 관객에게 펼쳐보인다는 측면에서 얼핏 연극무대와도 닮았다. 미술품 수장과 보존·복원에 특화된 청주관의 성격을 십분 살린 영리한 기획이다.

전시는 보존과학자 C의 일상과 고민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C는 콘서베이터(conservator), 청주(Cheongju), 3인칭 대명사 ‘씨’를 두루 아우르는 약칭이다. ‘C의 도구’는 보존과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수백 종류의 안료와 현미경 등 광학기기, 분석자료를 다양하게 배치해 보존과학실의 풍경을 재현했다.
오지호 작가 ‘풍경’ 속 나무 X선 찍으니 여인의 전신상이… 보존과학의 첨단 장비로 그림 속에 숨은 정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오지호 작가의 그림 ‘풍경’(왼쪽)에는 앙상한 나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을 X선으로 촬영하면 여인의 전신상(오른쪽)이 드러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오지호 작가 ‘풍경’ 속 나무 X선 찍으니 여인의 전신상이…
보존과학의 첨단 장비로 그림 속에 숨은 정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오지호 작가의 그림 ‘풍경’(왼쪽)에는 앙상한 나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을 X선으로 촬영하면 여인의 전신상(오른쪽)이 드러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장 한쪽 벽에 걸린 오지호 작가의 1927년 작품 ‘풍경’ 실물과 이 그림을 자외선, 적외선, X선으로 각각 촬영한 세 장의 사진은 마치 숨은 진실을 파헤치는 탐정 같은 보존과학의 묘미를 선사한다. 원본은 물론 자외선, 적외선 촬영에서 보이지 않던 여인 전신상 밑그림이 X선 촬영에선 마술처럼 뚜렷이 드러난다.

‘시간을 쌓는 C’에선 소장품 실물과 복원 과정을 담은 기록 영상을 함께 전시해 보존과학의 이해를 돕는다. 이갑경 작가의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1937)은 두 번의 대수술을 거쳤다. 캔버스 천이 찢어지고 물감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는 등 중병 상태가 확인돼 1989년 집중 치료가 이뤄졌다. 이후 2011년 보존처리에 사용된 재료가 들뜨거나 변색된 것이 관찰돼 2014년 재보존처리했다. 오랜 야외전시로 표면 변색이 심했던 니키 드생팔의 조각 ‘검은 나나(라라)’를 복원하기 위해 니키 드생팔 재단 측과 보존처리 방향을 협의하는 과정은 현대미술품 보존처리의 원본성과 진정성에 대한 의미를 숙고하게 한다.
붓과 현미경 등 보존과학 장비를 촬영한 정정호 작가의 ‘보존도구(시리즈)’.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붓과 현미경 등 보존과학 장비를 촬영한 정정호 작가의 ‘보존도구(시리즈)’.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어디까지가 작품의 원본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일까. 보존과학자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과제다. ‘C의 고민’은 바로 이 어려운 질문 앞에 선 보존과학자의 실존적 고뇌를 우종덕 작가의 설치 영상 ‘The More the better’(다다익선)로 풀어낸다. 단종된 브라운관 TV 부품 문제로 가동을 중단한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 보존처리에 관한 3가지 의견을 배우 한 명이 3개 채널에서 각기 다르게 개진하는 영상은 보존과학자의 치열한 내적 고민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우종덕 작가 외에 류한길, 김지수, 정정호, 주재범, 제로랩이 소리, 냄새, 도구 등을 주제로 보존과학의 다양한 면모를 해석한 신작을 출품해 자칫 실험실처럼 딱딱할 수 있는 전시가 한층 풍부해졌다.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해야 관람할 수 있다. 10월 4일까지. 

청주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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