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작가/작품 다채로운 전시 작가 작품! 아트 플랫폼 서울갤러리

 

    select product.* , fi.wm_filename, fi.wm_file_width, fi.wm_file_height from ( select pd.* from sp_work as pd ) as product left join sp_board_file as fi on product.wm_id = fi.wm_bid and fi.wm_main_yn = 'Y' and fi.wm_table = 'sp_work' where 1 = 1 and product.wm_email = 'eunjikim77@gmail.com' order by product.wm_sort desc, product.wm_id desc limit 0,4

김은지

Kim eun-Ji

  • 1977년 생

  • 서양화

작품보기

학력 / 경력

덕성여자대학교 서양학과/카셀예술대학

전시회이력

2007. 08~09 [멀티-컬쳐 프로젝트], 갤러리 EE피칸트, 독일
2007. 07 [Exsamen.07], 가구전시장, 카셀, 독일

수상이력

작가소개

elf-communication : 결핍의 커뮤니케이션

서원석

 

0. 도플갱어; 존재의 불안

 

그가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리 줄여서 말해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지만, 그뿐이었다. 닮은꼴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쌍둥이가 한 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육십억 명의 사람들 중에 정확히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닮은꼴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히, 정확히 똑같은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도플갱어가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그것(또는 그/그녀)을 위협적 존재로 인식한다. 그래서 둘 중 하나가, 때론 둘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 된다. 세상에 라는 존재는 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자아가 나의 존재를 부정케 한다 여기는 것일까. 세상에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하나의 현존재로서의 이성적 당위성 때문일까. ‘로 대체되는 순간, 가 잊혀지는 순간 죽고 마는 것이라는, ‘()’에의 절박함 때문일까.

중요한 것은 도플갱어를 의식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불안 심리가 발동된다는 것이다. ‘나란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하는 개인적 의문에서 시작해서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등의 사회적 질문을 거치며 는 한순간 라는 존재의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 스스로에 대한 불안, 존재의 결핍에 대해 김은지는 두 가지 행위를 통해 대처한다.

(1). 무의식의 무한 노동을 통한 불안제거; 드로잉

(2). 무한(無限)의 기의(記意)를 프레임에 봉인한, 결핍 인정; <self-communication>

 

1. 끝나지 않는, 그러나 이미 끝나버린

 

무수히 많은, 그리고 너무도 작은 원들을 통해 캔버스를 채운다. 이 원들로 커다란 캔버스를 채우기 위해서는 끔찍하게도경련이 날 정도의 노동과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죄수들의 몸을 혹사시킴으로서 쓸데없는 생각을 없애려는 간수의 의도처럼 반복된 무의식의 행위를 통해 불안을 지우려 한다. 그러나 신체에 고통을 가함으로서 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우려 하는 이러한 행위는 무의식적 의도와 다르게 의식적 형상을 드러낸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지우기 위해 취한 행위라고 언급한 순간 이미 그 결핍의 자리에서 존재를 느낀다. 즉 그의 반복된 행위는 타자의 자아를 의식한 것이다. 얽매임을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에 매달리는 이 끝없는 행위는 결론적으로 작가에게 있어 새로운 얽매임이 되고 만다.

사실 그의 신체적 행위는 차이를 경험함으로서 역으로 자아를 인식해가는 과정에 있다. 무한히 복제된 도플갱어 역시 완전히 같은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타자를 만들어 냄으로서 역으로 자신을 다시 확인시키는 도구로 쓰인다. 분명 정확히 똑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 고민하는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이미 여럿이다. 동일한 몸을 지녔다 하더라도 다른 인격이 발현되었을 때 그것은 나라고 이야기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드로잉의 무한히 반복되는 조그만 점들이 의식적으로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은 자아의 무한 반복과 그 각각의 개수만큼이나 많은 타자를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노골적으로 압축된 예가 <I & i>이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복제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신체는 붉은 실에 감겨 있으며 심지어 가위를 들고 있다. 그러나 몸을 감싸고 있는, 그것도 붉은 실, 그리고 뚜렷한 가위의 형상이 어떤 상징체계와 대칭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너무도 분명한 이 코드들은 작가가 아직 자신 안에서만 머물며 타자를 인식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벌거벗은 여인의 몸에 둘러져 있던 붉은 끈은 캔버스로 넘어오며 잘게 나뉘어져 다시 몸을 뒤덮는다. 김은지는 직설적 방법을 버림으로서 자신의 타자 화된 자아를 의식화된 무의식 속에 감춘다. 타자는 존재의 부재를 통해 인식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복제물로서만 메우려 한다. 그러니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2. 끝이 없는, 결핍의 프레임

 

스스로(self) 대화를 시작함으로서(communication) 자아는 바깥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자신 안에서, 나아가 타자와 접촉함으로서 스스로 완전해지고 있다. 작가는 도플갱어를 만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타자를 복제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타자는 <self - communication>에선 주물판 위에 놓인 신체가 스스로 각성하여 자아를 발현한다. 각성한, 또는 복제된 신체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모를 일이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자아 스스로가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는 주물 위에 다시 놓임으로서 수없이 복제됨을 암시한다. 자아가 복제되었으나 복제된 순간 그것은 원본과 또 다른 타자가 되고 원본을 타자로 하는 또 다른 자아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절단된 신체가 <self - communication>의 주물 판을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손은 주물 판 속에서 신체를 각성하고 있을 도플갱어, 또는 복제된 타자와 원본의 자아 중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즉 원본 그 자체에 대한 인식보다 자()와 타() 사이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차이가 각자를 인식하게 하고 존재하게 한다. 누구의 손인가? 이 물음을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관람자의 머릿속에는 온갖 자아들이 인식되고 존재하며 스스로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3. 결핍의 커뮤니케이션

 

존재가 존재로서 완전해지는 시발점은 스스로와 대화를 하는 방법을 깨달으면서부터이다. 도플갱어는 타인들 속에서 나를 잃고 대화할 방법을 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완전함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결핍된 존재이다.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다. 도플갱어를 타자로서 인식하는 법. 그와, 또는 스스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를 인식하고 그 간극을 드러내는 방법. 그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self-communication>속 부재의 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손이 아닐까.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