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전체보기 다채로운 전시 작가 작품! 아트 플랫폼 서울갤러리

 

2021 경남근현대작가조명전 《여산 양달석 黎山 梁達錫》

-

  • 작가

    여산 양달석

  • 장소

    경남도립미술관

  • 주소

    경남 창원시 의창구 용지로 296 (퇴촌동)

  • 기간

    2021-06-25 ~ 2021-10-10

  • 시간

    10:00 ~ 19:00 (휴관일 : 월요일)

  • 연락처

    055-254-4600

  • 홈페이지

    http://www.gyeongnam.go.kr/gam

  • 초대일시

  • 관람료

갤러리 가기

양달석, 낙원, 1963, 종이에 수채, 42x64cm , 개인 소장


전시 서문
 
“동화를 쓰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린다. 마치 아픈 매를 맞으면서도 웃어야 하고 찢어질 듯한 역경에서도 마음만은 행복하게 즐겨야 하는 모순처럼...”

- 양달석 회고록(1975) 중에서

 
정치와 권력, 역사와 예술은 어떠한 관계 속에 있는가? 다양한 시대의 소음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 되어 왔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의 삶과 역사를 되짚어 보게 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치열하고 기이한 상황 아래에서, 이따금 우리의 울분을 깨워낸다. 그 안의 예술은 더욱이 그렇게 존재해 왔다.
 
여산 양달석은 1908년에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경험하며 살았다.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전쟁, 분단국가와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정권까지. 죽고 사는 것, 먹고 사는 것이 우선시 되었던 우리의 20세기는 그렇게 시대적 모순과 억압된 체제 아래서 모든 이의 삶을 처절하고 힘겹게 버텨내도록 만들었다.
전업화가, 그리고 일곱 식구의 가장으로서 살아온 여산의 삶은 어땠을까? 21세기 최첨단의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그 모든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여산(黎山)’은 양달석 화백의 호다. ‘새벽녘의 희뿌옇고 어스름한 산’이라는 작가 자신의 설명은 그의 생과 시대적 배경, 또한 작품 속에 그토록 담고자 했던 가치들을 통해 다시금 그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소와 목동, 낙원과 동심의 세계, 동화와 민요 화가,, 여산을 대표했던 이러한 단어들은 그의 작품 속 조형미와 일치한다. 그러나, 보다 깊숙이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여산의 새로운 면모들을 느껴볼 수 있다.
 
실제 1950년대 이전 여산의 작품들은 한 예술가의 비폭력적 저항 의식이 느껴진다. 회색빛의 어둡고 애잔한 분위기가 감도는 농촌 풍경, 힘겹게 살아내고 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 서민들의 생활상, 혹은 오히려 그러한 서민들의 삶에서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담아내고자 했던 농민들의 강인한 모습까지. 이렇듯 여산이 표현한 한국 사회의 단면과 새로운 희망들은 암울한 시대 속 한 예술가의 강한 사회적 의식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산의 사회적 의식들은 소와 목동을 즐겨 그리던 1950년대 후반 이후 작품들에서 쉬이 찾아보기 힘들다. 혹은 그렇게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작품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아이들과 자연, 목가적인 농촌 풍경들은 흔히 새로운 낙원, 동심의 세상으로 해석되어 진다. 그렇다면, 그러한 낙원은 암울한 시대를 넘어서고자 했던 새 세상으로의 희망과는 무관한 것일까?
여산의 유족과 화우의 증언, 작가 자신의 회고록과 기고문들은 그러한 의문을 풀어 주었다. 더불어 소와 목동을 즐겨 그리던 시기 역시, 안타까운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함께 작업했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그의 작품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푸른 색감이 감도는 생활 풍경, 강한 에너지를 지닌 농민들의 모습, 어두운 시대 속 힘들었던 서민들의 모습, 고통 없는 낙원 속에서 뛰노는 소와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은유했던 또 다른 의미들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그의 화풍과 숨겨진 은유들은 안타까운 사회 현실에 대한 작가의 시선,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회적 바람과 이를 진정으로 표현해 내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를 짐작케 한다.
 
결국 작가는 어두운 밤을 걷어 내고 찾아온 새벽녘의 희뿌연 내일의 희망처럼, 암울한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세상에로의 예찬을 끊임없이 표현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산 양달석의 삶과 예술을 통해, 사회를 향해 외치는 그의 강한 메시지를 느껴보고, 시대의 억압과 권력, 그 아래의 예술과 예술가의 삶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양달석, 자갈치, 연도미상, 종이에 수채, 36x52cm, 개인 소장


Ⅰ. 현실과 꿈: 전업화가로서의 삶과 예술
 
“나는 고통을 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이 같은 어두운 착각은 소싯적부터 68살이나 된 지금까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 양달석 회고록(1975) 중에서
 
1975년 기고한 여산의 회고록 서두이다. 이 짧은 한마디가 말해주는 여산의 인생은 단연 고통의 연속이었으리라.
 
여산은 전업화가였다. 평생 동안 단 6년의 직장생활을 제외하고 평생을 작업에 매진하며 일곱 식구를 책임져왔다. 끊임없는 시대의 억압들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또 가장으로서 끝없이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는 화가라는 직업을 버리지 않았다. 전업화가 양달석. 그것은 그를 힘들게 했지만, 또 그를 살게 했다.
 
소와 목동

소와 목동은 여산을 대표하는 작품의 소재이다. 실제 작가는 목동 생활로 외롭고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 그는 주변에 평화로이 뛰놀던 또래들이 부러웠고, 자신의 삶이 불행히 느껴졌다. 당시 그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초목과 들, 바람과 구름, 그리고 소였다. 양친의 죽음과 머슴살이라는 생애 첫 시련 이후,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버티게 해줬던 자연은 그의 희망이며 행복이었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작품 대부분의 소재였던 소와 목동은 그가 유년 시절 그랬던 것처럼, 실제 어두웠던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행복, 위안이 되었으리라.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동심의 낙원, 작가의 체험적 회상과 공상, 목가적인 노래와 동요, 현실을 벗어난 상상의 세상’ 등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과 유족에게 남긴 말들을 통해, 평화롭게만 보이는 소와 목동의 조형들에도 당시의 시대상을 넌지시 표현해 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여산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암울한 현실과 꿈에 대한 희망

195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식민시기와 전쟁이라는 큰 시련을 겪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분단된 국가 아래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정치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시대의 소음들이 들끓던 시기이다. 이렇게 끝없는 억압 아래에서 전업화가 여산은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왔을까? 또한 이러한 시대적 억압과는 별개로, 커가는 다섯 명의 자식들을 부양하며, 더 이상은 고생시키고 싶지 않는 아내를 바라보며, 어떠한 마음으로 작품에 매진했을까?
 
실제 소와 목동의 소재로 끊임없이 작품을 폭발적으로 그려내던 당시 시기에는, 푸르른 색조의 서민들의 모습, 혹은 애잔함이 느껴지는 풍경 등의 작품들도 함께 작업해왔다. 이러한 또 다른 화풍의 작품들은 여산의 초기 작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시대의 소음들과 전업 화가로서의 삶이 그의 화풍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지만, 그의 이러한 사회적 저항 의식들은 꾸준히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었고, 이 화풍은 말년의 작업까지 나타나고 있다. 암울한 현실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때론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척박한 현실을 넘어서서 새로운 꿈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찾고자 했던 작가의 사회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양달석, 무제, 1953년, 캔버스에 유채, 50x65cm,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Ⅱ. 끝없는 헌신: 아버지 양달석
 
“이때 나는 용기를 얻어 나의 평생을 희생하더라도 자식들을 훌륭한 인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 양달석 회고록(1975) 중에서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빨갱이 화가로 몰렸던 그는 여러 차례 경찰에 붙들려갔다. 이유도 모른 채 매를 맞아야 했고, 임신한 아내까지 잡혀가 고문을 당했던 일화들은 암울했던 시대를 대변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삶의 동력이 된 그의 버팀목은 바로, 자신이 평생 책임져왔던 가족들이었다.
 
여산의 회고록과 기고문들 중에는 가족의 이야기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 어머니를 대신해 자신을 지극히 돌보아 주었던 누이에 대한 추억, 훗날 중풍에 걸려 자신을 보살폈던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누부야, 누부야(누이의 경상도 방언)”라고 부르며, 딸을 의지했던 일화는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30대 초반이었던 시절, 가난한 전업화가로서의 삶 때문에 두 아들을 잃었다. 이에 대한 아픔과 죄책감은 훗날 가족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으로 더욱더 작업에 열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나 신경 쇠약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모든 것에 의욕을 잃었던 당시에도 큰아들의 대학 수석 합격 소식은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렇게 여산은 가족들 때문에 죽을 고통의 고문을 버텼고, 가족을 위하여 생의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평생을 고생하며 자신을 뒷바라지 해주었던 아내, 자신을 극진히 보살피던 누이와 딸, 세상의 빛을 오래 보지 못하고 떠났던 두 아들, 그림밖에 모르던 아버지 곁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자랑이 되어준 아들들까지. 그러한 여산의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은 작품들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양달석, 잠시, 1957년, 캔버스에 유채, 112x156.5cm, 동의대학교 석당기념관 소장


Ⅲ. 시대의 소음을 너머: 억압된 체제와 예술
 
“농촌의 비참상을 리얼하게 그렸던 나의 작품은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 양달석 회고록(1975) 중에서
 
여산은 일제 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4번의 입선을 했다. 그 중 네 번째 출품했던 작품 <고향>이 낙선하였고, 당시 보조 심사위원에게 물어 들었던 낙선의 이유였다. 그가 회고하는 작품 <고향>은 명태같이 바짝 마른 농촌의 목동들이 다 쓰러져 가는 농가를 배경으로 모여 있는 40호의 그림이었다.
 
비폭력적 저항 의식을 담은 초기 작품

1932년 25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던 작품은 ‘만주로 피난 가던 한국 농민의 참상’을 그린 것이었다. 다음 해 역시 ‘마치 무엇인가를 집어삼킬 듯한 태산 같은 힘을 가진 농부의 모습을 담았다’는 신문 평을 받았던 작품으로 입선을 했고, 세 번째 입선작은 ‘농악을 통해 한국 농민들의 저항을 표현한 작품’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회고와 몇 남지 않은 그의 초기 작품들을 통해 엿볼 수 있듯이, 그의 초기 작품들에는 주로 비참한 사회 속에 힘겹게 살아온 농민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이후 1940년대 작품에서 둥근 붓 터치와 밝은 색감들이 조금씩 나타나긴 하지만, 여전히 어둡고 암울했던 당대 현실들을 가감 없이 표현하며 사회를 고발하듯 저항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잘 알려진 여산의 화풍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작품들이다.
 
아픔의 기록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염원

해방 이후 많은 한국인들은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더 이상 고통 없는 세상에서,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했을 것이다. 여산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간절한 염원을 담아 척박한 현실 고발적 작품과는 또 다른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종군 화가로 입대했다. 격전지를 찾아다니며 직접 관찰한 해군의 모습과 당시의 피폭된 시가지의 모습들을 기록하였다. 가까이서 전쟁을 경험하고 기록했던 종군화가 양달석은 전쟁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느끼며 애국심과 종전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이충무공의 간절한 기도 모습을 작품에 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염원하던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금방 다가오지 않았다. 이에 여산은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가득 담은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작품 <잠시>는 그가 그토록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농민들을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밝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담아내었다.
 
삶과 시대와 예술

동화 작가, 민요 작가로 불려왔던 여산 양달석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사실, 그 누구보다도 암울한 시대를 고민하고, 새 시대를 향한 염원을 여실 없이 드러내 온 작가였다. 한 평생 그림만을 그려온 전업화가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새로운 시대로의 꿈은 절대 놓아버릴 수 없는 유일한 희망이었으리라.
 
말년에는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여전히 사회적 발언들을 은유하기 위해, 현실을 가감 없이 표현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예술에는 그의 삶이 담겨 있었고,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