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현재전시 다채로운 전시 작가 작품! 아트 플랫폼 서울갤러리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귀국전

A Dialogue between Kim Jeong-hui and Literati of the Qing Dynasty

  • 작가

  • 장소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층

  • 주소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서초동) 예술의전당

  • 기간

    2020-01-18 ~ 2020-03-15

  • 시간

    10:00 ~ 19: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연락처

    02-580-1300

  • 홈페이지

    http://www.sac.or.kr

  • 초대일시

  • 관람료

    일반 10,000원 / 청소년 8,000원 / 어린이 6,000원

갤러리 가기
예술의전당(사장 유인택)은 과천시, 예산군,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와 공동으로 2020118()부터 315()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이하 <추사귀국전>) 전시를 개최한다. 이 전시는 2019618일부터 823일까지 개최된 동명(同名)의 전시를 한국에서 다시 개최하는 것이며,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를 마치면 제주, 예산, 과천에서 1년 동안 순회 개최된다.
이 전시는 <같고도 다른(사이불사 似與不似) : 치바이스와 대화(대화제백석 對話齊白石)>(2018.12.05 ~ 2019.2.17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 이은 두 번째 한(() 국가예술교류 프로젝트다.
지난 중국 전시에서는 30여만 명이 관람하는 등 중국 대중과 학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 파장은 국내 공공기관의 호응으로 이어져 지난해 9월 예술의전당, 과천시(김종천 시장), 예산군(황선봉 군수),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고길림 본부장)글로벌 추사 콘텐츠 개발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추사귀국전>은 그 양해각서에 따른 첫 번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2020년도 한해를 서울- 제주- 예산- 과천으로
전국순회하는 <추사귀국전>
 
이번 <추사귀국전>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학예(學藝)의 특질인 ()의 미학(美學)과 동아시아 서()의 현대성(現代性)’을 주제로, 간송미술문화재단, 과천시추사박물관, 제주추사관, 영남대박물관, 김종영미술관, 수원광교박물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선문대박물관, 일암관, 청관재, 일중문화재단, 개인 등 30여 곳이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이 전시를 통해 현판, 대련, 두루마리, 서첩, 병풍 등 추사의 일생에 걸친 대표작은 물론, 추사의 글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20세기 서화미술 작가의 작품 120여 점을 볼 수 있다.
<추사귀국전>을 개최하는 예술의전당 유인택 사장은 “21세기 중국에서 확인된 19세기 동아시아 세계인(世界人) 추사 선생의 학예성과를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대중들이 새롭게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라는 다짐을 밝혔다.
한편 213()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추사국제학술포럼이 예술의전당 주관으로 개최된다. 이 행사에서는 이동국 예술의전당 시각예술부 큐레이터가 모더레이터로 나선 가운데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의 기조 강연을 시작으로 중국 측에서는 예신(叶欣), 푸치앙(傅强), 우구오바오(吴国宝)가 발표를 할 예정이다. 한국 측에서는 이완우, 허홍범, 정병규가 추사학예의 세계성과 현대성을 이야기할 예정이다.
 
 추사학예의 세계성과 현대성을 확인한 지난 중국 전시
 
그간 우리는 추사를 한국 안에서만 최고라고 해왔다. 이번 전시를 기획해나가는 과정에서 솔직히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사를 중국에서 알아줄까하고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기우였다. 한국보다 중국에서 100여 년의 간극을 일시에 허물며 추사가 살아 돌아와서 중국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매일 5천여 명을 헤아리는 관람객들이 추사를 만났다. 문화예술계 지도자와 전문연구자, 서법가, 정치지도자와 관료는 물론 일반관람객 모두가 추사를 더 정확하고 진지하게 감상하고 토론하였다. 이런 광경은 좀처럼 한국의 서예박물관 전시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또 한국에서 추사학예를 기괴고졸(奇怪古拙)’한 조형미학을 특징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괴()의 본질인 현대성(現代性)을 간파해내기보다 추사체(秋史體)의 성취를 모화주의(慕華主意)의 산물이나 개인의 천재성이 강조된 나머지 신화처럼 여기기도 했다. 진위논쟁에 빠져 정작 추사체(秋史體)의 미학(美學)을 세계사적인 관점과 현대적인 미로 연결시켜 바라보지 못하였다.
<추사중국전>에서 추사의 <계산무진谿山無盡>을 본 우웨이산吳爲山 중국국가미술관장은 글씨를 넘어서서 그림이다. 허실(虛實)의 미학을 극대화하면서 심미적으로나 조형적으로 현대적이고 추상적이다.”라고 평가했다.
아시아 문명과의 대화일환으로 열린 <추사중국전>국제학술포럼에서 중국국가미술관 장칭[張晴] 부관장은 추사는 글씨의 성인(서성, 書聖)이다. 이번 전시가 실증하듯 경전(經典)’을 남김으로써 역사에 기여하고 있다. 왜 이제야 우리는 서성(書聖) 추사를 알게 되었는가.”라고 만시지탄(晩時之歎)을 하였다.
추사야 말로 요즘 현대인이 추구하는 미학과 조형구조 그 자체를 이미 150여 년 전에 제시하고 있다.[중국미술관 장칭[張晴]부관장]
북방민족인 김정희는 성인(聖人)이다. 경전(經典) 창출을 통해 서법역사(書法歷史) 발전에 심대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서법(書法)의 모국(母國)이라하는 중국으로부터 추사체(秋史體)가 비롯되었지만 추사는 당시 서법을 혁신(革新)하였다. 하지만 추사의 한계도 분명한데, 갑골문 금문의 연구실천은 오늘날 우리작가들의 몫이다“ (우구오바오吳國寶 중국미술관 소장작품부 서법분야전문 학예사/서예가)
<추사중국전>의 가장 큰 성과는 중국 관람객과 대화함으로써 추사는 세계이고 현대라는 생각을 실증하였다는 점이다. 이와 상응하여 이번 <추사귀국전>은 오늘날 한국 관람객들이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추사 서예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시도하고자 한다. 19세기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시공간의 지평에서 추사 글씨의 세계성과 현대적 미를 이번 전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동아시아 서()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추사체(秋史體)
- “()하지 않으면 역시 서()가 될 수도 없다.”

 
청나라 금석고증학이 19세기 발흥하여 동아시아 서()의 역사학은 첩학(帖學)에서 비학(碑學)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이러한 때 추사와 청나라 문인인 옹방강, 완원의 한·중간의 교류는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뜻하는 학예일치(學藝一致)와 비학(碑學)와 첩학(帖學)의 융합을 뜻하는 비첩혼융(帖混融)의 결정체인 추사체(秋史體)’를 창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추사체의 조형미학과 정신경계를 요약하면 기괴고졸(奇怪古拙)과 유희(遊戱). 하지만 추사 생존 당대에도 추사체의 괴의 미학에 대해서 비난과 조롱이 비등하였다. 추사는 이에 대해 ()하지 않으면 역시 서()가 될 수도 없다.”라고 응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글씨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교가 좋고 나쁨(공졸, 工拙)을 또 따지지 마라[非以書爲也. 工拙又不計也.]”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추사의 학예성취에 대해서 청조문화(淸朝文化) 동전연구(東傳硏究)저자인 후지스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이처럼) 청조문화(淸朝文化)에 정통하고 새롭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조선에 수립 선포한 위대한 공적을 이룬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고금독보(古今獨步)라는 느낌이 든다.”라고 말한다.
  
반역적성격과 큐비즘 성격이 있는
고금독보적(古今獨步的) 추사체(秋史體)
 
전 중국서법가협회 주석이자 현존 중국최고의 서법가로 추앙받는 션펑(沈鵬, 1931~현재)변혁의 중심에 있었던 김정희의 서법(書法) 작품은 강렬한 반역적(反逆的) 성격이 있다. 특히 비()가 첩()으로 들어가는 모종의 불협과 부조화(不協調)’의 성격 때문에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김정희의 서법에서 조선민족의 강렬한 독립과 자주(自主)와 자강(自强)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고 말했다.
 
 20세기 한국현대 서화미술의 토대인 추사체
 
이런 맥락에서 김종영의 추상조각, 윤형근의 획면추상, 손재형, 김충현의 비첩혼융((碑帖混融)은 추사체의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선구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가 그간 20세기 한국의 문예를 식민지, 서구화라는 관점에서 전통과 현대가 단절되었다는 기존 시각을 탈피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추사귀국전>은 추사의 전통적·한국적 미학이 중국이라는 다른 공간과, 또 현대라는 다른 시대와 대화함으로써, 동아시아와 현대를 아우르는 공유자산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학예일치’ ‘해동통유’ ‘유희삼매
3가지 키워드로 조명하는 추사의 ()’의 미학
 
이번 전시는 ()의 미학을 키워드로 추사체의 성격 전모를 연행(燕行)과 학예일치(學藝一致) 해동통유(海東通儒)와 선다일미(禪茶一味) 유희삼매(遊戱三昧)와 추사서의 현대성 등 총 3부로 구성하였다.
<연행과 학예일치>에서는 해석 1) 옹방강, 완원으로부터 실사구시(實事求是) 관점의 경학(經學)과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을 수용하여 고예(古隷)로부터 역사와 서법이 녹아든 추사체를 완성해내는 것, 해석 2) 추사가 옹방강, 완원을 만나 실사구시(實事求是) 관점에서 해석한 경학(經學)과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을 수용하고, 고예(古隷)로부터 역사와 서법이 녹아든 추사체를 완성해내는 것을 보여준다.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제3편지>,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 <복초재시집(復初齋詩集)>, <소영은(小靈隱)>, <상량·상견(商量·想見)>, <문복도(捫腹圖)> 등 추사와 청조 문인과의 교유관계 핵심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임군거효렴경명(臨君擧孝廉鏡銘)>, <예학명임(瘞鶴銘臨)>, <배잠기공비제발(裵岑紀功碑 鉤勒本 題跋)>,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鏡)> 등 추사체(秋史體)의 궁극인 고예(古隷)를 재해석한 작품과 <양한금석기>, <해동금석원>, <해동금석영기> 등 조·(朝淸) 문인들의 금석학 연구 자료들을 통해서 서()가 학문의 전제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살펴본다.
<해동통유와 선다일미>에서는 제주 유배라는 극한의 실존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를 자처하면서 유불선(儒佛仙)을 아우르는 통유(通儒)이면서,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와 만나 선()과 차()를 하나로 승화시키는 추사의 정신세계를 보는 것이 관건이다.
<문자반야(文字般若)>, <칠불설게 도득문지(七佛說偈 都得聞之) 등 게송(偈頌) 모음, <직심도량(直心道場)>, <영모암편배제지발(永慕庵扁背題識跋)>, <명선(茗禪)>,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그리고 <부기심란(不欺心蘭)>, <향조암란(香祖庵蘭)>, <추사 소치 합작 시화 산수국’> 등을 전시하는데, 이들은 통유(通儒)와 서화일체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유희삼매와 추사서의 현대성>에서는 비첩혼융(碑帖混融)추사체가 발산하는 불계공졸(不計工拙)과 천진(天眞)정수볼 수 있다.. <계산무진(谿山無盡)>, <도덕신선(道德神僊)>, <순로향(蓴鱸鄕)>, <사서루(賜書樓)>, <판전(板殿)>,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 <무쌍·채필(無雙·彩筆)>, <인고·폐거(人苦·弊去)> 등의 작품을 통해 추사체의 유희삼매 경지를 만나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김종영 윤형근 손재형 김충현 등 20세기 한국의 현대서화미술 대표작가들이 추사서를 통해 자신의 예술을 여하히 성취해냈는가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


□ 전시 개요

- 전시기간 : 2020년 1월 18일(토) ~ 3월 15일(일)
- 관람시간 : 오전 10시 ~ 오후 7시 (입장마감 : 오후 6시) * 매주 월요일 휴관
- 도 슨 트  : 11시, 14시, 17시 (*주말.공휴일 포함)
- 장     소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층 전관
- 주     최  : 예술의전당, 과천시, 예산군,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 주     관  : 예술의전당, 과천시 추사박물관, 예산군 추사기념관, 제주 추사관
- 입 장 권  :  일반    (만19세 이상)                   10,000원 
                  청소년 (만13세 이상~만18세 이하)   8,000원
                  어린이 (만7세 이상~만12세 이하)     6,000원

                  통합권(추사전+툴루즈 로트렉전)  성인    20,000원 (5천원 할인)
                                                              청소년 15,000원 (5천원 할인)
                                                              어린이 10,000원 (6천원 할인)


□ 대표 작품
 
김정희金正喜(1786~1856)
<계산무진(谿山無盡)>  19세기 종이에 먹 165.5x62.5cm 간송미술관 소장

김정희金正喜(1786~1856)
<도덕신선(道德神僊)> 19세기 종이에 먹 32.2×117.4cm 개인 소장


김정희金正喜(1786~1856)
<판전(板殿)>1856 종이에 탁본 22.8×85.0cm 개인 소장


김정희金正喜(1786~1856)
<유희삼매(游戏三昧)> 완당집고첩(阮堂执告帖)19세기 종이에 먹 18.0×414.0cm 김종영미술관 소장

           
김정희
金正喜(1786~1856)                                               김정희金正喜(1786~1856) 

<무쌍·채필(無雙彩筆)>                                                   <명선(茗禅)>
19세기 종이에 먹 각 128.5x32.0cm 일암관 소장                      19세기 종이에 먹 115.2x57.8cm 간송미술관 소장
 

 
김정희金正喜(1786~1856)
칠불설게 도득문지등 선시문 모음七佛说偈 都得闻之等 禅诗文集   19세기 종이에 먹 33.9×22.8cm 개인 소장


김정희
金正喜(1786~1856)

<향조암란(香祖庵蘭) 난묵합벽첩(蘭墨合壁帖)19세기 종이에 먹 26.7×16.8cm 개인 소장


옹방강翁方纲(1733~1818)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제3편지>   1817 종이에 먹 23.6×304.0cm 개인 소장

          
정조경程祖庆(1785~1855)                                김정희金正喜(1786~1856)
<문복도扪腹图>                                            <임군거효렴경명(臨君擧孝廉鏡銘)>
1853 비단에 수묵 94.5×26.2cm 개인 소장             19세기 종이에 먹 86.0x46.0cm 개인 소장  
 

□ <추사귀국전> 전시구성
 
[제1부] 연행(燕行)과 학예일치(學藝一致)
 
여기서는 추사가 북학(北學)의 핵심인 청대(淸代)의 경학(經學)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을 조선에 도입하여 역사(歷史)와 서법(書法) 두 방면으로 어떻게 연구/실천해서 학예일치(學藝一致)의 경지로 완성해내는지를 대표작품으로 보여준다.
추사는 24세 연행(燕行)때 청조 학예계 거장인 78세 옹방강과 47세 완원으로 부터 경술문장(經術文章) 해동제일(海東第一)’로 격찬을 받으며 두 분을 평생 스승으로 모신다. 그 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모토로 편지지도와 문집(文集금석문(金石文)학습을 통해 경학(經學)과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 서법(書法)을 연마하여 학예일치(學藝一致)의 경지를 일생에 걸쳐 구축하였다. 추사의 경학은 마융(馬融)과 정현(鄭玄, 한 대의 훈고학)을 두루 망라하고, 정자(程子) 주자(朱子, 송대 성리학)를 등지지 말라[博綜馬鄭, 勿畔程朱]”가 말해주듯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의 입장에 서있다. 금석고증학자로서 추사는 청조 학예방법론을 우리 역사현장에 적용시켜 일생동안 조선화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31(1816)<북한산진흥왕순수비>조사를 시작으로 <경주무장비(慶州藏寺碑)>발굴은 물론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해동비고(海東碑攷)저술하였고, 67(1852) 북청(北靑) 유배(流配)시에는석노시(石砮詩)」「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을 제작하였다. 또 이런 성과는 중국에서 유희해의 <해동금석존고><해동금석원>, 옹수곤의 <해동금석영기>와 같은 조선 금석고증학 열풍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추사는 왕법(王法)에 정통성을 둔 기존 서사(書史)를 뒤집은 완원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지남으로 왕법(王法)은 물론 그 이전으로 돌아가 서()의 근원인 북비와 한예를 하나로 녹여내면서 독자적인 비첩혼융의 추사체(秋史體)를 창출해내고 있다. 얼마나 한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한예(漢隸) 한 글자는 해서와 행서 열 글자와 맞먹는다.漢隸一字, 可抵楷行十字.”고 할 정도다. 특히 예서(隷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고, 한예(漢隷)의 묘는 오로지 졸()한 곳에 있음[隷書是書法祖家漢隷之妙專在拙處]”을 간파하고, 한예 중에서도 서한(西漢)시대 정() () () ()의 글자로 거슬러 올라가 추사체(秋史體)를 창출해내고 있다. 요컨대 이러한 추사와 옹방강 완원의 일생에 걸친 학연과 묵연의 성과로 인해 한중교유 역사상 19세기는 가장 찬란한 황금기로 자리매김 되었다.
 
주요작품은 <심중니·이명도(尋仲尼·以明道)> <추사·담계필담서(秋史·覃溪筆談書)>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제3편지> <박종마정 물반정주(博綜馬鄭 勿畔程朱)>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 <복초재시집(復初斋詩集)> <소영은(小靈隱)> <죽재·화서(竹斋·花屿)> <상량·상견(商量·想見)> <완원남북서파론’(阮元南北書派論)> <임군거효렴경명(臨君擧孝廉鏡銘)> <임원수원년경명(臨元壽元年鏡銘)> <예학명임(瘞鶴銘臨)>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鏡)> <배잠기공비제발(裵岑紀功碑 鉤勒本 題跋)> <유득공시의도(柳得恭詩意圖)> <문복도> <송자하선생입연시(送紫霞先生入燕詩)> 등이다.
 
 
[제2부] 해동통유(海東通儒)와 선다일미(禪茶一味)
 
정통 유학자(儒學者)인 추사는 유교(儒敎)는 물론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아우르는 통유(通儒)로서 학문과 사상을 서예술(書藝術) 하나에 모두 녹여내고 있다. 특히 제주 유배 시기의 처절한 실존을 소동파(蘇東坡)를 사숙하여 학예(學藝)로 극복해내면서 해동통유(海東通儒)의 면모를 완성해내고 있다. 추사는 55(1840.6.22)때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임명(任命)되었으나 윤상도옥사(尹尙度獄事)가 재론(再論)되면서 이미 망자가 된 부친 김노경이 탄핵(彈劾)되고, 자신은 제주도(濟州道)에 유배(流配)되었다. 제주유배시절 추사는 소동파가 그랬듯이 유마거사(維摩居士) 병거사를 자처하면서 자제소조(自題小照)담계(覃溪)고경(古經)을 즐긴다라 일렀고, 운대(雲臺)남이 일렀다 해서 저 역시 이르지를 않는다라 하였으니,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 어찌하여 해천(海天)의 입립자가 원우(元祐)의 죄인과 같은 고. 覃溪云嗜古經芸臺云不肯人云亦云兩公之言盡吾平生胡爲乎海天一笠忽似元祐罪人라고 할 정도다.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비첩혼융(碑帖混融)으로 실천해내면서 추사체(秋史體)를 왕성하게 실험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초의선사(艸衣禪師)와 유()()을 넘나드는 교유를 통해 다선일미(茶禪一味)와 전다삼매(煎茶三昧)의 경지를 구축하였다. 주요전시작품은 <문자반야(文字般若)> <무량수각(无量壽閣)> <‘칠불설게 도덕문지(七佛說偈 都得聞之)’등 게송(偈頌) 모음> <직심도량(直心道場)> <제해붕대사영(題海鵬大師影)> <관음경·팔중송(觀音經·八重頌)> <영모암편배제지발(永慕庵扁背題識跋)> <명선(茗禪)>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일로향각(一爐香閣)> <전다삼매(煎茶三昧)> <합병신천지(合丙辛天地) 우향각(芋香閣)> <부기심란(不欺心蘭)> <향조암란(香祖庵蘭)> <추사 소치 합작 시화산수국’> 등이다.
 
 
[제3부] 유희삼매(遊戱三昧)와 추사서의 현대성(現代性)
 
추사는 해배 이후 강상생활 · 북청유배 · 과천시기에 비첩혼융의 굴신지의屈伸之義의 필획(筆劃)이 창출해내는()’의 미학을 골자로 하는 추사체(秋史體)를 자유자재로 구사해내고 있다. 심지어 글씨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공졸(工拙)을 또 따지지 마라[非以書爲也. 工拙又不計也.]”라고 하고 있다. 추사체의 비난과 조롱에 대해서마저도 ()하지 않으면 역시 서()가 될 수도 없다.[不怪亦無以爲書耳]”고 응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추사체(秋史體)()’의 미학경계는 방정(方正)의 끝이자 기괴(奇怪)의 궁극지점이다. “구서(歐書)도 역시 괴목(怪目)을 면치 못했으니 구와 더불어 함께 돌아간다면 다시 사람의 말을 두려워할 게 있으리까. 절차고(折釵股)ㆍ탁벽흔(坼壁痕) 같은 것은 다 괴의 지극이며 안서(顔書) 역시 괴이하니 왜 옛날의 괴는 이와 같이 많기도 한지요. 歐書亦未免怪目與歐同歸復何恤於人耶如折釵股圻壁痕皆怪之至顔書亦怪何古之怪如是多乎哉라고 추사는 말한다.
추사체(秋史體)는 왕법(王法) 중심의 첩학(帖學)과 그 이전의 비학(碑學)이 시기별 혼융(混融)궤적을 그리며 다음과 같이 완성창출되고 있다.
 
. 시체습용기(時體習用期) [24세 연행(燕行) 전후]
. 옹방강/팔분예(八分隸)학습기(學習期) [3,40]
. 구양순(歐陽詢)/고예(古隸)재해석기(再解析期) [50세 전후]
. 비첩혼융기(碑帖混融期) [55~63세 제주 유배(流配)]
. 추사체(秋史體)완성기(完成期) [63~71세 해배(解配)이후]
 
주요전시 작품은 <계산무진(谿山無盡)> <도덕신선(道德神僊)> <순로향(蓴鱸鄕)> <사서루(賜書樓)> <판전(板殿)>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 <칠언시사구 행서팔곡병(七言詩四句 行書八曲屛)> <청관산옥만음(靑冠山屋漫吟)> <무쌍·채필(無雙·彩筆)> <인고·폐거(人苦·弊去)> <왕사정 제중삼영(王士禎 齋中三詠)> 등이다.
 
위의 작품을 보노라면 그야말로 천진(天眞)이자 유희삼매(遊戱三昧)의 정신경계에 노니는 것이 추사체(秋史體)이다. 일체의 구속(拘束)에서 벗어난 대자유(大自由) 절대자유(絶對自由)의 경지인 것이다. 예술의 기원이 인간의 유희본능(遊戱本能)이라고 할 때 예술의 본령인 시서화(詩書畵)를 일체(一體), 융복합(融複合)으로 하나 되게 유희삼매(遊戱三昧)’로 살아간 추사는 문자영상(文字映像)시대 인공지능(人工知能,AI)시대 오늘날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종영 윤형근 손재형 김충현 등 20세기 한국의 현대서화미술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서예는 물론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추사서의 조형과 미학 전통이 현대와 호흡하며 한국예술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 추사 김정희 학예연보


추사 김정희 영정 부분


♦ 추사 연행(燕行)이전 18세기 한중 주요 문화사
 
1705          팔대산인 주탑 졸
1716          <강희자전(康熙字典)>완성
1720          조선 숙종(肅宗) 붕어(崩御), 경종(景宗)즉위
1725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완성
1735          청 건륭제 즉위
1764          양주팔괴 정섭, 금농 졸
1765          홍대용<을병연행록>저술, 엄성 반정균 교유
1776[정조1] 규장각(奎章閣)설치
1777          고증학자(考證學者) 대진 졸
1778~1779 박제가 이덕무 연행 / 박지원<열하일기> 저술
1782          <사고전서(四庫全書)>완성
1790[건륭55] 박제가 유덕공 2차 연행, 박제가 3차연행, 이즈음 이조원 반정균 서 문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박제가 <<정유고략(貞蕤藁略)>>, 유득공<<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중국출간.
 
 
Ⅰ기(期) : 시체학습기 時體學習期
 
1786/1          충청도(忠淸道) 예산(禮山)에서 경주김씨(慶州金氏) 장손(長孫)으로 출생(出生,6.3), 부父 김노경金魯敬, 모母 기계유씨杞溪俞氏. 증조부 (曾祖父)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증조모(曾祖母) 영조(英祖) 의 장녀(長女) 화순옹주(和順翁主).
1791,1792/6,7 추사 <입춘첩(立春帖)>을 보고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내가 장 차 가르쳐서 성공시키겠다(吾將敎而成之)’고 하였고, 채제공蔡濟恭) 은 대서예가를 예언함,
1800/15         정조(正祖)승하, 정순(貞純)왕후(王后) 경주(慶州) 김씨(金氏) 수렴청 정(垂簾聽政), 박제가朴齊家에게 사사 받기 시작함.
1801/16         박제가, 4차 연행(燕行)중 옹방강과 석묵서루에서 만남. 조선 천주 교탄압[신유박해(辛酉迫害)]
1805             <사고전서(四庫全書)>책임편집자 기윤 졸 
 
Ⅱ기(期) : 연행(燕行) ~30대(代) 중반(中盤)
 
1809,1810/24,25 생원시(生員試) 초시입격(初試入格), 연행(燕行), 김노경(金魯敬)의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수행(10.28) / 석묵서루에서 옹방강(翁方綱)과 사제의(師弟儀)를 맺고, 옹방강이 쓴 「유당(酉堂)」 「보담재(寶覃齋)」 편액(扁額)을 선물 받음(12.29) / 태화쌍비지관(泰華雙碑之館)에서 완원(阮元)과 사제의(師弟儀)를 맺고, 완원의 저서 『경적찬고(經籍纂詁)』 106권 78책, 『연경실집(揅經室集)』, 『13경주소교감기(十三經註疏校勘記)』 245권, 태화2비 탑본(搨本)을 기증받음 / 완원, 주학년(朱鶴年), 홍점전(洪占銓), 이정원(李鼎元), 담광상(譚光祥), 김용(金勇), 옹수곤(翁樹崐), 유화동(劉華東), 이임송(李林松) 등이 모여 김정희의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줌. 이임송(李林松)이 전별시(餞別詩)를 쓰고, 주학년(朱鶴年)이 ‘추사전별도(秋史餞別圖)’를 그린 「증추사동귀시첩(贈秋史東歸詩帖)」을 김정희에게 증정함.(2. 1)
 
1812/27           신위(申緯)의 주청왕세자책봉사(奏請王世子冊封使) 연행(燕行)때 「송 자하입연시(送紫霞入燕詩)」 10수(首)를 써 보냄(7.18) / 홍경래난 평 정됨.
1814/29           「계당서첩(溪堂書帖)」 씀. 
1814               <성경(聖經)>중국어 완역본 출간
1815               <설문해자주(說文解字註)>저자 단옥재 졸
1815년/30        옹방강 「제1봉편지(第一封手札)」(1.20) 로 추사의 경학(經學)질의에 상답(詳答)하고 연경(硏經) 지도(指導)함.
1816/31           옹방강이 「별봉(別封) 편지」와 『복초재시집(復初齋詩集)』 등을 보내 옴(10.27). 옹방강「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지음.
1817/32           경주(慶州) 「무장사아미타조상기비(鍪藏寺阿彌陀造像記碑)」 단편(斷 片)을 찾아냄.(4.29.) 조인영(趙寅永, 1782~1850)과 진흥왕(眞興王)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다시 찾아 68자(字)를 심정(審定) 함.(6. 8) 옹방강 제3봉 편지로 학경(學經)을 지도하고 제경(諸經)의 부기(附記)를 보내줄 것을 약속함.(10.27)
1818/33           옹방강 졸(1.26/86세).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씀 
                      정약용<목민심서(牧民心書)> 완성
1819/34           식년문과급제(式年文科及第)
1820년/35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 및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 『동몽선습 (童蒙先習)』 씀.
1822/37           김노경 동지정사 연행, <직성유궐하 수구만천동> 해서대련작품을 고순에게 써 보냄.
1823/38           규장각(奎章閣) 대교(待敎).
 
Ⅲ기(期) : 30대(代) 중반(中盤) ~ 40대 중후반(中後盤)
 
1824 /39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 「호고·연경(好古·硏經)」 예서대련(隷書對聯)을 등전밀(鄧傳密)에게 써 보냄. 경주(慶州) 창림사탑(昌林寺塔) 출토(出土)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고증(考證)함.
1826/41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暗行御史), <박종마정 물반정주>를 이 장욱에게 써 보냄.
1827/42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동부승지(同副承旨)
1829/44           순조의 명으로 『문사저영(文史咀英)』 표제標題 및 서문序文을 씀.
1830/45           <윤상도옥사>(8.28), 김노경 고금도 위리안치
1831/46           유희해가 보낸 『황청경해(黃淸經解)』 1,408권을 이상적으로부터 받 음.(1.22) 
 
Ⅳ기(期) : 40대(代) 중후반(中後盤) ~ 63세(歲) 제주유배(濟州流配)
 
1832/47           「조광진(曺匡振)에게 보내는 편지」 <난맹첩>
1834/49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저술. <임한경명>
1835,1836/50,51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명선> <완호탑비> 등
1838/53            권돈인(權敦仁)이 왕희손(汪喜孫)에게 보낸 장찰(長札)이 「해외묵연 (海外墨緣)」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짐. 김정희의 대작(代作)인 이 글은 그의 학예관을 피력한 것으로 청나라 학예계에 충격파를 일으킴.
1839/54            형조참판(刑曹參判). <묵소거사자찬> 「옥산서원(玉山書院)」
1840/55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임명(任命),(6.22), 윤상도옥사(尹尙 度獄事)재론(再論), 김노경탄핵(彈劾)(7.10), 제주(濟州) 유배(流 配)(9.4). 제1차 아편전쟁(阿片戰爭)
1842년/57         부인 예안이씨(禮安李氏) 졸(卒)(11.13) <영모암편배제지발> 등
1843/58            이상적(李尙迪)으로부터 계복(桂馥)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庫)』를 받음. 백파(白坡) 율사(律師)와 왕복 서한(往復書翰)으로 토론을 벌임. 허련(許鍊)이 「완당선생해천일립상 (阮堂先生海天一笠像)」을 그림.
1844/59            이상적(李尙迪)으로부터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받 음. 이상적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줌.
1845/60            청(淸) 거유(巨儒) 이조망(李祖望), 김정희의 학예관을 접하고 이에 대한 소견을 상답(詳答)함. 「왕맹자선생해외묵연책자답문16칙(汪孟 子先生海外墨緣冊子答問16則)」을 저술함. 영국(英國) 군함(軍艦) 사 마랑(Samarang)호가 측량차 정의현(㫌義縣) 우도(牛島)에 정박(碇泊) 사실을 김명희(金命喜) 권돈인(權敦仁)에게 편지로 알림.(5.22) 위원 『해국도지(海國圖志)』를 구해 읽음.
1846년/61          예산(禮山) 화암사(華巖寺)에 「무량수각(无量壽閣)」 「시경루(詩境樓)」 「시경(詩境)」 글씨를 써 보내고,「화암사상량문(華巖寺上樑文)」을 지음.
1848년/63          헌종(憲宗), 추사를 석방(釋放)하라 명함(12. 6.)
 
Ⅴ기(期) : 63세(歲) 해배(解配) ~ 71세(歲) 까지
 
1849/64            제주 해배(解配, 2.7). 서울 강상(江上, 龍山) 정착. 「예림갑을록(藝林 甲乙錄)」 저술. <은해사銀海寺)」 「대웅전(大雄殿)」 「불광(佛光)」 「보화루(寶華樓)」 등. 10.13 완원 졸
1850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 발생(~1864)
1851/66            진종조례론(眞宗祧禮論)의 배후 발설자로 지목되어 함경도(咸境道) 북청(北靑)에 유배(流配)됨.(7.22)
1852년/67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경境)」 <석노시>제작. 북청 해배, 과천(果 川) 과지초당(瓜地艸堂) 정착(10.9)
1853/68            <임곽유도비> <숭정금실> 등
1854/69            <신안구가> <완염합벽첩> <춘풍추수> 등
1855/70            「백파율사비문(白坡律士碑文)」 「효자김복규정려비(孝子金福奎旌閭 碑)」「성담상게(聖譚像偈)」 <불이선란도> <하정진비> 등
1856/71            상유현(尙有鉉)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를 씀. 「해붕대사 화상찬 (海鵬大師畫像贊)」 「대팽·고회(大烹·高會)」 <비취병 산호> 「판전(板 殿)」 등. 과천(果川)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서거(逝去)(10.10)
1856                 청, 제2차 아편전쟁(阿片戰爭)
1860                 조선, 최제우 <동학(東學)>창시
1862                 청, 양무운동(洋務運動)
1866/1871/1876 조선,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 강화도조약(江 華島條約) 
1894                청일전쟁(淸日戰爭).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갑오경장(甲午更張)
1897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
1898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
1912                중화민국(中華民國) 건국
1910                한일강제병합(韓日强制倂合)
1912                중화민국(中華民國) 건국
1919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5.4운동
1948                대한민국정부수립
1949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건국
1950               6.25한국전쟁
1992               한중수교(韓中修交)
2019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전시 개최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