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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여성주의 문화 예술 운동사 기획전

The Matriarchy; Women, Utopia and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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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무 파인아트는 2021년 12월 18일 < The Matriarchy; Women, Utopia and Narrative > 展을 선보인다.
한국 여성주의 문화 예술이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려는 의도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미술, 연극, 영화, 신문 등 다양한 시각 매체를 활용하여 한국 여성주의 문화예술이 지나온 시간을 구성하였다.

 한국의 여성 문화 예술인들이 전세계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과 함께하면서도 한국 사회 안에서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된 문화예술계에서 협력하고 타협하거나, 때로는 갈등과 충돌을 불사하며 예술적 발언을 해왔던, 그리고 기존 미술 개념과 제도를 비판하고 그 틈새를 꾸준히 벌리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온 여성주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전시에서는 여성 노동자 문제,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1987년부터 1994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열린 《여성과 현실》 展과, 여성적 특성과 여성 미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1994년 《여성, 그 다름과 힘》 展, 그리고 1999년 한국 여성 미술의 흐름을 점검하고 여성 미술사 정립을 위해 예술의 전당에서 140명의 작가들과 함께 한 《99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 展 등 활발했던 한국 현대 여성주의 문화예술운동의 자료들을 수집하여 선보인다.

또한, 1997년 출범하여 아시아 여성 영화 인력을 발굴, 여성 영화를 제작 지원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원본 기획안과 기록사진 등 뿐만 아니라, 여성 문화 생산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앞장섰던 연극 분야의 <버자이너 모놀로그>, <자기만의 방>,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의 대본과 공연 사진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여성의 주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다양한 문화 현상에 대한 시의성 있는 비평을 위한 페미니즘 문화예술 계간지인 < If > 의 초창기 매거진도 주목할 만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미술, 연극, 영화, 신문, 매거진 등 다양한 시각 매체를 활용하여 한국 여성주의 문화 예술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여성적 관점의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해 주체적으로 법과 제도를 바꾸고 세계를 성찰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확장해 온 현대 여성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미술, 연극, 영화, 신문, 매거진 등을 망라한 이번 전시는 사단법인 여성문화예술기획, 여성 역사공유공간 여담재, 사단법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프북스, 여성신문과의 협력으로 오는 2022년 3월 30일까지 진행된다.





■ 전시서문
 
한국 현대 여성주의 문화 예술 운동사 기획전
“The Matriarchy; Women, Utopia and Narrative”

김홍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전 서울시립미술관장)
 

1. “여성, 유토피아, 서사”
 
강원도 강릉시의 신생 미술공간 대추무파인아트는 “한국 현대 여성주의 문화예술 운동사 기획전: The Matriarchy; Women, Utopia, and Narrative”를 개최한다. “여성주의 운동의 세계적 흐름속에서 한국 여성주의 문화예술이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본다”는 설희경 대표의 취지문에서 드러나듯이, 이 기획전은 현역 페미니즘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한국 페미니즘의 전성기를 추동시킨 1990년-2000년대의 문화운동의 아카이브를 함께 선보이며 문화예술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의미를 가시화하고 있다.
 
영화, 연극, 전시 아카이브는 여성영화제와 여성문화예술기획이 제공했고, 미술 전시에는 주최측이 초대한 한국 화단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윤석남, 박영숙, 이순종, 정정엽, 류준화가 참여했다. “여성, 유토피아, 서사”라는 전시 제목의 키워드는 모계사회 또는 모권주의를 충족시키는 기본 개념들이자 5인의 참여작가를 관통하는 공통분모처럼 보인다. 미술계가 공인하는 1세대 페미니스트 윤석남(1939)과 박영숙(1941), 연배로는 후배지만 두 선배와 줄곧 함께 활동해온 정정엽(1962)과 류준화(1963), 독자적 방식으로 페미니즘에 개입하고 있는 중간 세대 이순종(1953), 이 작가들은 각기 고유한 매체와 양식으로 5인 5색의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지만, 화업을 통해 한국 여성화단과 페미니즘 미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점에서 한데 만난다.
 

2. 윤석남, 박영숙, 정정엽, 류준화, 이순종은 누구인가?
 

한국의 여성미술이 단지 “여성에 의한 미술” 이상으로 인식되고, 페미니즘 미술이 미술계 안팍으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민중미술의 출현과 맥락을 같이한다. 독재정권과 서구로부터 유입된 모더니즘 추상미술에 맞서 사회변혁과 민족주의 미술을 주창한 ‘현실과 발언’, ‘임술년’, ‘광주자유미술인협회’, ’두렁’ 등 민중계열의 소집단이 1986년 민족미술협의회를 발족하며 정치미술의 새 페이지를 여는 사이, 동 시기에 결성된 여성 그룹 ‘10월모임’과 ‘터’의 동인들이 민미협의 여성분과 (차후 여성미술연구회로 개편, 이하 여미연)로 합류하며 의식화된 본격 페미니즘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1987년 시작된 연례전 ‘여성과 현실’전은 페미니즘 의식을 고취하고 창작 활동을 견인한 여미연의 중추적 프로젝트였다.
 
10월모임의 동인으로 여미연 창립회원이 된 윤석남은 괄목할만한 화업과 혁혁한 페미니즘 활동으로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여미연 뿐 아니라, 여성학과 인문사회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가부장 문화의 대안으로 페미니즘 문화운동을 전개한 또하나의 문화(1984년 발족)에 참여하고, 여성문화예술기획(1992), 여성영화제(1997)의 발기인이자 문화 액티비스트인 이혜경과 함께 두 조직을 장기간 헌신적으로 이끌어온 그의 노고는 한국 페미니즘 문화의 정착과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요인으로 평가된다.
 
박영숙은 대학 졸업후 ‘여상’ 잡지의 기자를 거쳐 1966년 개인전으로 사진계에 데뷔했다. 1992년 연례전에 참여하면서 여미연에 합류한 후발주자이지만 윤석남과 공동전선을 펼치며 민중계 페미니즘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1999년 시작된 ‘미친년 프로젝트’로 주목받는 페미니스트 사진작가로 부상했는데, 그런 그가 2007년 돌연 신진작가 발굴과 사진계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사진전문 화랑 ‘트렁크’를 열고 갤러리스트로 진로를 바꿨다. 그러나 2016년 다시 전업작가로 귀환하여 현재까지 왕성한 창작, 전시활동을 하고 있다.
 
터의 동인, 두렁의 일원, 여미연의 창립 멤버인 정정엽, 그는 여미연 활동과 병행하여 1986-87년 인천 부평공단에 취업하여 노동현장을 경험한 삶의 페미니스트이다.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일손나눔’, 미술그룹 ‘갯꽃’ 등 인천 기반의 소집단 활동에 이어 1994년부터 인천미술인연합 회원으로, 2003년에는 미술인회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운동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95년 여미연 해체 후 1997년에는 30대 페미니스트 작가와 기획자 그룹인 ‘입김’을 결성하여 연대활동과 창작활동을 병행하는 예술가 액티비스트로서 기량을 발휘했다.
 
류준화 역시 1991년 ‘여성과 현실’전 참여로 다음해부터 여미연 회원이 되고, 정정엽과 함께 입김을 창립한 공인된 페미니스트이다. 그는 페미니스트 선후배, 동인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서울 중심으로 활발한 전시활동을 펴는 한편, 1999년부터 경북 봉화군 비나리마을에 정착해 지역작가이자 문화활동가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명호 산골미술관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작가 모임과 미술 캠프를 유치하는 등 예술과 농사, 작가와 주민을 정서적으로 연결하는 매개자로서 역내 문화발전과 주민들 삶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여미연 출신으로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문호를 연 위의 4인과 달리, 이순종은 대학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14년간 남부 텍사스에서 살았다. 건조한 사막지대에서 몸의 수분마저 빠지는 심리적 고통을 겪으며 현지에서 미술대학원을 마쳤다. “전쟁이나 다름없는” 해외생활을 마치고 1989년 귀국한 이래 목마름을 달래듯 창작과 전시활동에 전념했다. 페미니즘 미술운동의 현장이나 그룹 활동으로부터 거리를 취한 채 그는 여성의 “뫔” (몸과 맘을 뜻하는 자신의 조어)에 근거한 에로티시즘으로 자기만의 페미니즘을 구가하고 있다.
 

3. 윤석남, 박영숙, 정정엽, 류준화, 이순종은 어떤 작업을 하는가?  
 
윤석남의 ‘블루 룸’
윤석남의 화업은 어머니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1986년 시월모임의 제2회전 ‘반에서 하나로’에 출품한 ‘손이 열개라도’를 비롯해, 1993년 개인전 ‘어머니의 눈’의 출품작들은 자신 어머니께 바치는 헌정이자 모성에 대한 경의였다. 여성적 연대감, 관계지향적이고 포용적인 모성을 가시화하는 어머니의 초상은 이 전시를 기점으로 조형상의 변화를 가시화했다. 이때부터 폐목이나 널판지 위에 그려진 목각 페인팅 또는 “회화적 조각”으로 이전의 리얼리즘 오일 페인팅과 다른 새로운 여성 양식을 창안한 것이다.
 
1995년 이후 작가는 모성보다는 여성성, 여성욕망에 초점을 맞춰 ‘핑크 룸’ 시리즈를 발표했다. 무쇠 갈고리가 큐션 위로 돌출되거나 다리로 대치된 위험한 핑크색 의자, 위태롭게 바닥에 깔린 핑크빛 구슬, 강렬한 핑크 빛 조명, 예의 목각 여인상으로 구성된 설치작품이다. 억압된 여성 욕망의 분출이듯, 매혹과 위험, 환상과 공포가 공존하는 이 작품은 수차례의 해외 순회전을 거치며 작가를 국제적 반열에 올려놓은 수작으로 꼽힌다. 핑크 룸에 이어 작가는 2010년 바리데기로 표상되는 무속적 요소와 함께 사후세계에 대한 암시를 극화시킨 멜랑콜리한 ‘블루 룸’을 발표, 룸 시리즈의 변화를 시도했다. 여기서는 바리공주가 저승으로 가기 위해 건넜다는 바다를 표상하기 위해 푸른색 구슬로 바닥을 깔고 저승과 관련되는 12가지 문양을 푸른색 종이로 오려낸 종이 작업으로 벽면을 장식했다
 
이번 전시에 작가는 자신이자 어머니인 여인상, 한복을 걸치고 의자에 앉아있는 목각 인물에 초점을 맞춘 ‘블루 룸 III’(2021)을 출품한다. 이와 함께 전통 나무 기와인 “너와” 위에 검은색 아크릴로 그린 여인의 초상화 ‘너와 시리즈’ (2013-2016)도 선보인다. 작가는 목조나 설치작 이외에, 연필 드로잉이나 채색화 자화상을 비롯해, 역사적 여성 영웅들이나 친지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인물화를 자신의 생애 프로젝트로 지속하고 있다. 너와 인물화는 새로운 재료발굴 뿐 아니라 대표 여성 장르인 정통 초상화의 맥을 잇고 있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박영숙의 ‘장면’  
박영숙은 경력 초기인 1970년대 중반 한강변 여성노동자, 영등포 성노동자들을 촬영하며 사회주의 시각에서 포착한 성적 불평등의 현장을 기록했다. 1980년대 후반 페미니즘 활동에 경도된 이후 작가는 여성의 신체적, 심리적 경험에 기반하는 본질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 “또 하나의 문화”가 여성해방 시와 그림의 만남이라는 개념으로 기획한 ‘우리 봇물을 트자’전(1988)에 출품했던 ‘장미’와 ‘마녀’, ‘여성 그 다름과 힘’전(1994)에 윤석남과의 공동작으로 발표한 ‘자궁 스토리’가 여성성과 여성상의 은유를 담은 대표적인 본질주의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1999년 ‘팥쥐들의 행진’전에서는 여성의 광기를 표면화함으로써 젠더 뒤집기를 시도한 ‘미친년들’을 발표하며 그의 페미니즘이 해체주의 담론에 의거하는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와 여성적 광기를 등가물로 인식하면서 미쳐야만 자유로울 수 있는 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심리경으로 드려다 본 이 프로젝트는 여성은 왜 태생적으로 차별적 존재인가 하는 근원적 문제를 비언어적인 히스테리칼한 여성언어로 풀이한 정신분석학적 작업이다. 2005년까지 총 9개 연작으로 구성되는 ‘미친년 프로젝트’를 통해 박영숙은 여성화단과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전폭적 지지를 얻게 된다. “미친년”이라는 문화적, 정치적 함의가 전문가들에게 어필하고, 제목의 강렬한 전복적 뉘앙스가 여성 객들의 숨겨진 욕구를 일깨우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까닭이다.  
 
이번 출품작 ‘장면’ 시리즈(1963-67)는 대학을 갓 졸업한 박영숙이 명동길을 지나는 천진난만하고 발랄한 여성들을 포착한 흑백 다큐멘터리 스냅사진이다. 본격 페미니즘 의식이 싹트기 이전의 작품이지만, 동시대 남성 사진작가들과 다른 시각에서 여성을 대상화한 이 청년기 초기작은 차후 화가 석난희, 농구 선수 박신자, 연극인 박정자, 방송작가 홍승연 등 다수 여성들을 앵글에 담은 ‘36인의 포트레이트’(1981)로 이어지는 여성적 사진찍기, 나아가 미친년에서 발화되는 페미니즘 사진찍기가 이미 엿보이는 점에서 재조명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정정엽의 초기 목판화
정정엽의 1995년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에는 시장에서 나물을 팔거나 장보고 돌아가는 아낙네, 집에서 밥상차리는 주부 등, 여성의 일상적 삶의 현장을 담은 그림들이 대거 전시됐다. 당연시되거나 무시되는 살림 노동이 인간의 생명과 안녕을 보우하는 근본 행위이자 미덕이라는 진리를 일깨워주려는 듯, 그림속의 여자들은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다. 이 전시에는 정정엽의 브랜드가 된 곡식도 등장했다. 자루에 담긴 색색의 곡식들, 그 가운데 1998년부터 대표적인 소재이자 주제가 된 팥도 미리 선보였다.
 
이제 그가 그리는 팥들은 그냥 팥이 아니다. 작가는 팥이 밥상에 올라올 때까지의 농사와 유통의 지난한 노동 과정을 화면에 한알 한알 붓질하는 자신의 예술 노동으로 되살려본다. 노동에 대한 경의이건 집요한 편집증적 예술 행위이건, 팥알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새로운 미학적 결실을 선사 받는다. 팥이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화면을 장악하며 자기확장, 자율진화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팥알이 점묘법의 조형단위가 되어 “올오버” 전면화 또는 미니멀 단색화를 방불케하는 추상회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 알맹이들은 종래는 2017년에 촛불광장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것은 한겨울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메웠던 역사적 장면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팥들의 축제였다. 2021년 ‘조용한 소란’전에 나오는 곡식과 나물들 역시 포스트코로나 시대 자연과 생명의 가치를 생명력을 일깨워 줄 소재 이상의 제의적 상징물로 의미화된다.     
 
팥, 콩, 나물 등 그가 그리는 농산물은 저잣거리 행상들, 생계와 함께 살림과 육아를 맡은 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가사노동의 무게를 대변하는 우화적 모티프가 아니었을까? 그가 인천부평공단 시절에 제작한 목판화 역시 공장에서 밑바닥 일을 하는 여성 직공들과 함께 한 노동운동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판화를 제작하여 여성노동자들에게 보급하는 문화적 방식으로 노동을 일상화하는 동시에 신성화했다. 그 당시 목판화 가운데 대표작 몇 점이 이번 전시에 출품된다.
 
류준화의 ‘내가 너를 본다’
류준화는 전통적인 페인팅에서 출발하여 양식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내용적으로는 페미니즘적인 회화로 여미연의 ‘여성과 현실’전에 참여해왔다. 이후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기류속에서 등장한 포스트민중작가들의 정서를 공유하며 혼성적인 조각설치 작업이나 신표현주의 경향의 페인팅으로 민중페미니즘의 이념적 무게를 덜어내며 포스트페미니즘 단계로 진입했다. 천으로 만든 커리커쳐식 인형으로 유명 여배우를 재현하거나, 소비욕망을 일으키는 광고속의 여성 이미지와 마네킹 하체를 조합한 ‘정숙한 아내-매춘부’ (1994)등이 전자의 사례이다. 언어를 잃어버리고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현실과 잠재된 욕망을 인형놀이와 같은 재현적 유희로 들춰낸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내가 너를 본다’(1999)가 후자의 경우다. 이 아크릴 페인팅 연작은 포르노 잡지에 나오는 절정에 오른 남성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여성적 응시의 대상으로 물신화한 5점의 작품과 대중매체에서 차용한 여성 이미지를 남성으로 변신시킨 전복적인 “미러링”작업 5점 등 모두 10점으로 구성된다. 작가는 이미 시대를 앞서는 성인식과 조형 감각으로 젠더 정치학과 응시의 문제를 화두에 올린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작가의 젠더 의식은 여성에서 소녀로 초점이 맞춰지고, 사회의식은 자연과 생명을 아우르는 생태주의로 영역대가 확장됐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정체성이 모호한 소녀는 불안정한 여성의 정체성을 요약한다. 순수성과 폭력성이 교차되는 소녀의 감성을 대변하듯 소녀는 상상계와 현실계의 경계적 인물처럼 환상적이고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소녀는 생태계의 회복시키는 자연과 생명의 힘, 나아가 가부장제하의 여성들을 위로하는 치유의 힘을 상징한다. 최근 작가는 개인전 ‘감사의 테이블-33인의 여성들’(2021)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근대기 여성들을 부모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환생한 바리데기 소녀와 동일시하며 소녀에서 순국열사로 이어지는 여성의 역사를 찬양하기 위해 화초와 책과 음식이 가득한 감사의 테이블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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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종의 ‘미인도’
이순종의 작품세계는 에로티시즘을 축으로 펼쳐진다. 삭막한 미국생활 탓인지, 한국에서 그가 목격하는 것은 모든 것이 생명력을 지닌 에로틱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남녀의 사랑뿐 아니라 삶의 본질에 관계되는 인간애와 같은 것이다. 길거리 간판들, 황학동 시장의 키치한 잡동사니, 심지어는 군인, 병영, 무기에서도 에로스를 발견한다. 에로스의 창조적 기능을 직시하며 그는 인간, 사회, 세상에 존재하는, 성과 내밀하게 연결된 모든 삼라만상에 에로티시즘을 확대시킨다. 무기들로 번안된 그릇들을 부엌 찬장에 배열해놓은 초기의 “구급용 찬장” (1996)이나 생명을 살리는 침술을 적군을 무찌르는 총검에 비견시킨 근자의 ”백만대군”(2018)에 이르기까지 그는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권력의 상징인 군대문화를 들여다보며 그로부터 에로스의 에너지를 읽어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여성의 머리카락에서 관능적 에로티시즘과 페미니즘의 파워를 발견한다. 머리카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에로틱 아트의 전형적 소재이지만 그는 한국 에로틱 아트의 정통 계보를 계승하듯, 신윤복의 역사적 작품 ‘미인도’를 차용하여 여러 버전의 미인도(2001-2019)를 제작해 왔다. 신윤복 미인도의 에로스는 가슴이나 성적 부위가 아니라 머리카락으로부터 도출된다. 조선시대 여인의 길고 까만 머리카락은 무의식에 잠재된 에로스의 신체적 표현으로, 작가는 그것을 촉각적이고 주술적이며 치유적인 힘을 갖는 침에 비견시킨다.  
 
이번 전시에 한지에 먹으로 그린 원형의 ‘미인도’가 출품된다. 여인의 풍성한 머리카락 타래는 남성을 향한 위험한 매혹이자 백만대군의 총검 못지않은 치명적인 무기임을 시사한다. 머리카락으로 사대부 문인화 전통을 반격하듯, 그는 인조 머리카락으로 그린 ‘여인의 사군자-매난국죽’(2001)을, 자신,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3인의 머리카락을 혼합하여 둥근달을 형상화한 ‘허스토리- 달’(2011)을 발표했다. 작가는 개인 서사를 여성의 역사로 확장시키는 한편, 붓 대신 머리카락으로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하며 여성적 에로티시즘의 역사에 일획을 가하는 것이다.
 
 
4.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전망
 
페미니즘은 가부장사회가 존속하는 한 결코 폐지될 수 없는 여성들의 문화적 과제이다. 한국에 페미니즘이 도입된지 40년, 그간 여성의 지위나 권익은 다소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도 유리천장을 깨기에는 역부족이다. 더구나 정치는 남성적 영역, 문화는 여성적 영역으로 치부되어 여성의 창조적 본능마저 폄훼되어 왔다. 그러나 문화 예술 영역 내 여성들의 창의력과 지적활동은 미래 사회를 규정 짓는 중요한 문화적 인자이자 국가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것이 “She’s coming”이라는 구호를 뒷받침할 여성 파워의 잠재력이다. 창의력이 키워드인 미술분야의 페미니즘, 특히 동시대 페미니즘 미술의 당위가 여기에 있다.
 
상기 5인의 페미니즘 미술작가들의 경력과 작업이 말해주듯이,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적 조형언어를 발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회적 모순과 젠더 불평등이 부계적으로 구축된 언어에 근간한다는 전제에서 부계적 기준과 사회적 편견에 맞서 자신 삶과 예술적 비전을 정당화할 언어를 창안하는 역전의 행위를 통해 현대 페미니즘 의제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작업은 또한 페미니즘은 이제 단순한 자매애를 넘어 주변인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일깨운다. 여성은 비권력자이기 때문에 교란이 가능하고 스스로 언어를 획득했을 때 하위주체로서 말을 할 수 있다. 이렇게 각성된 의식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이 5인의 작업과 함께 전시된 아카이브 자료들이 한국의 페미니즘과 여성미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전시전경 1 윤석남, BLUE ROOM #3, 2010



전시전경 2



전시전경 3



전시전경 4


전시전경 5 윤석남, UNTITLED,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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