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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갤러리 전시작가 공모 선정작가전
남수정 《깊은 숨》

Nam Su Jeong 《Deep Breeath》

  • 작가

    남수정

  • 장소

    서울갤러리

  •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124 (태평로1가)

  • 기간

    2022-02-18 ~ 2022-02-25

  • 시간

    9:00 ~ 18:00

  • 연락처

    02-2000-9777

  • 홈페이지

    http://www.seoulgallery.co.kr

  • 초대일시

  • 관람료

갤러리 가기
■ 작가노트


작가는 선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선으로만 사물을 묘사함으로 사실적 입체를 거부하고 원근을 무시함으로 현실적 구체성을 거부한다.
현실적인 사물묘사가 아닌 것이다.
현실적 위계가 없는 화면은 정신적인 표현을 하기에 그 만큼 자유롭다.
사실적인 묘사는 통상적 인상을 극복하기 힘들고 나의 의도는 상투적인 이해나
제시가 아니라 잡초,풀,꽃들이 가지고 있는 은유적 표현이다.
추상에 빠지지 않고 구상에도 적절하게 거리를 가지면서 나만의 화면을 얻어낸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현실적인 식물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자는 게 아니라
생명체라는 관념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적인,손으로 만져지는 식물이 아니라 이념적이고 개념적인 생명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생명체가 되어 있는 내가 있다.



■ 작가소개



작가는 1969년 대한민국 부산출생으로
국립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에서 한국화를 전공 하였다.
 
대학시절부터 ‘선’ 과 ‘먹’ 에 심취하여 그에 천착한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선이라는 개념이 어떤사물의 윤곽을 충실히 드러내주는 경계의 역할을 넘어
또 다른 새로운 발언을 할 수 있는 메카니즘으로 다가왔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91년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그때의 선들은 구체적인 형상과 배경의 경계를 거칠게 그려져 있으며 서로 혼재되어 뒤섞여 있었다.
감정을 먹의 농담과 붓에 전달되는 힘의 강약으로 표현하여 선에 생동감을 불어 넣고 있으며 물고기와 새, 건물 속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회에 대한 우울함과 비판적 관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2013년 개인전에서의 소재는 꽃과 숲이었다.
길을 걷다가 무심코 나뭇잎 하나를 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잎맥, 수맥과 같은 자연에서 발생한 선들이 작가에게는 뜻밖의 경외감을 불러 일으켜주었다.
예전에 그었던 선들에 비해 강하지도 굵지도 않았지만 그 실타래처럼 엮인 선들에서 또 하나의 우주질서를 보게 되었다.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이는 것처럼 더 깊숙이 들어가면 지금과는 또 다른 형상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이 작가를 매료시켰다.
 
작가는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였다.
선에 대한 자신감은 화면의 바탕과 선의 재료를 이질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나타낸다.
바탕화면은 한국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오랜 기간 동안 다져진 기법과 재료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의 색은 철저히 선을 중심으로 선별된다.
꽃의 색채와 배경색의 보색대비는 선을 부각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자칫 강렬한 색대비가 더 부각되어 화면상의 선이 늦게 인지되는 점이 우려되는 부분이기도하다.
 
그래서 색을 아예 배제하고 오로지 선으로만 작업해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작가의 작업이 선 하나만으로 이에 준하는 아우라를 생성할 수 있을 정도로 화면을 온전하게 완성하는 것이 가장 큰 쟁점인 것 같다.
과감하게 색을 없애고 백지에 선만으로 구성하여 그렸을 때 선의 비중이 훨씬 커지는 만큼 좀 더 세밀한 기법을 구사하는 필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선으로 실현한 유기적 질서
작가 남수정
 
꽃과 식물은 일반적으로 자연물에서 아름다움으로 대표되는 구체적인 표상으로서 인간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 할 수 있는 소재로 받아들여져 왔다. 예술가들에게도 꽃은 형태나 색채 등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자연을 넘어선 추상적인 미의 개념을 아우르며 소재로써 널리 애용되고 있다. 꽃에 대한 아름다움이 너무나 일반적인 통념으로 자리 잡아왔기 때문일까 현대미술에서 단지 꽃에 대한 심미안을 작품의 소재나 주제로 삼는다면 평범하다고 생각되거나 다소 정체된 느낌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하지만 그 피사체를 확대한다거나 시선처리를 다르게 한다면 그 통념적인 꽃이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
수평적인 관점에서 확대된 피사체를 살펴보자면 꽃에 대한 심미안을 뒤로하고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선’ 이다.
 
식물자체의 고유한 형태를 만들고 있는 무수히 많은 선의 구조물은 화면 안에서 그렇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게끔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 이것은 관찰에 의한 선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데, 작품상의 잎맥이나 꽃잎에 나타나는 중복되는 곡선과 선의 방향이 다분히 작가의 주관적인 움직임을 통해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의 주인공은 꽃이 아니다.
 
남수정의 선은 식물의 줄기와 잎, 꽃, 그리고 암술과 수술 등의 윤곽을 구획하여 형태를 만드는 기본적인 수단이자, 일정한 방향과 굵기의 선들이며, 우회하거나 모이는 등의 세밀한 곡선이 돋보인다. 이 선들은 고스란히 작가의 필력으로 드러나는 ‘회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선과 선이 만나는 접점으로 생기는 형태는 마치 머리카락이 여성의 가르마에서 자연스럽게 나눠지고 흘러내리거나 명주실에서 뽑은 실타래가 놓여 지듯이, 양감과 질감을 형성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아카시아와 민들레의 앞과 꽃에서 집합, 확산, 상향, 하향과 같은 하나의 유닛(unit)이 모여 전체 형태를 구성하는 것처럼 섬세한 선들의 집합은 중력에 따르는 대상의 모습을 순간순간 결정하면서 자연스레 움직인다.
 
하나의 유기체와 우주 속의 질서, 어떻게 보면 그 기본 구조는 비슷하다고 보 수 있다. 그 무엇이 생명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세포와 같은 최소단위가 상위 구성요소와 맞물리면서 순환적인 메커니즘을 이룬다. 남수정 작가는 화면 내에서 선을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유기적인 구조 체계를 만들과 있으며, 나아가 온전히 선을 통해서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 평론
 

어떤 ‘있는 것’의 통찰
 
 
남수정의 꽃은 어떤 정황이나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나 움직임이 없는 부동의 사물인 것 같다. 실재 꽃의 부분이거나 화병에 꽂힌 것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지의 어떤 순간, 시간성이 탈거된 이미지로 보인다. 현재로 주어지고 현재만이 그 자체의 실재를 드러내지만, 현실적인 것, 현실을 보여주는 관계가 부재한 채 드러난다. 그의 꽃은 현재로서 지각하는 일일 뿐이다. “현재란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존립한다.”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성적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이해한다면 “시간은 타인과 관계하는 사건 자체”이다. 배경이 없어 타자와의 관계가 부재한 듯한 이런 몰시간적 표상이 ‘물자체’로 지각 가능한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이런 특징이 제기하는 질문이야말로 남수정의 꽃을 이해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일차적인 만남이다. “표현적인 의미는 이상적 객체들이며, 시공 속에 존재하는 실재적 사물 곧 대상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지만, 이 표현적이면서도 반드시 사물이 표현하는 것을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예술 자체의 시각을 긍정한다고 해도 그의 꽃은 과잉의 감성을 요구한다.
 
그 꽃은 일상의 것보다 더 크게 그려져 일반적 인상을 벗어난다. 그래도 흔한 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그 꽃이 현실의 사물 같지 않다. 현실로 주어지는 것은 현실을 이루는 배경과 더불어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꽃, 자체만으로 주어질 때 꽃은 현실이기보다 사물로,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현실의 삶 안에서 그저 사물로 주어지는 경우가 가능할까. 현실은 언제나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사물을 있게 하고 사물을 보게 하며 사물을 이해하게 한다. 그렇게 사물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남수정의 꽃은 현실 속의 사물로서 꽃이 아니라 그저 그것 자체로 주어진다. 현실의 관계에서 일탈한 상태로 만나진다. 현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이유다. 현실이 아니면서도 현재일 수밖에 없는, 현재로 만날 수밖에 없는 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흔하디흔한 꽃, 지금 보아내는 것으로 현재라는 시간성을 보이는 사물인데도 현실로 주어지지 않는다니.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어디 있으며 또 다른 이유가 그림 밖에 따로 있을까.
 
꽃이라고 구체적인 이름을 들먹이다 보면 어느덧 형상의 불명료함을 만나고, 형태를 더듬다 보면 형태를 덮고 있는 선으로 시선이 달아난다. 선으로 시선을 옮기다 보면 가득 찬 화면의 구조에 헤매게 된다. 끝내는 무엇을 보는지 모르게 된다. 남수정의 꽃을 볼 때 드는 막연한 불명료함, 인식 불가능하거나 감각 과잉의 어떤 지점에서 오는 낯섦이 이런 것에 연유한 것이 아닐까. 꽃 자체로 있기, 아니 꽃이라는 기호로 있기다. 작품의 양가적 성격이다. 그의 꽃은 시선 바깥의 대상에 대한 연상보다 그것 자체로 생성되고 관계 맺으며 이름과 사물 사이를 오가는 순환의 완결성을 끊임없이 연기하면서, 혹은 지체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게 불러내는 인상이 그렇다. 재현의 욕망으로 출발하지만, 표상을 넘어서는 만남으로 꽃의 요청, 분명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스르르 벗어나게 하는 꽃들의 향연이다.

꽃 그리기는 꽃이라는 단순한 말이 가진 의미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나 배경 없이 전개되는 이런 특징이 불러오는 심미주의의 환상은 어쩔 수 없다. 머뭇거리다 그런 유혹을 수긍하고 만다.
배경은 곧 지각 대상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말한다. 현실태는 언제나 그 배경과 더불어 지각될 때 현실로서 구체성을 띠게 된다. 어떻게, 어떤 관계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상은 대상 자체로 있지만 언제나 타자와 더불어 지각되고 그 지각이 사물의 대상적 성격을 만들어낸다. 어떤 관계로 읽히기 마련이다. 어떤 관계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방법이자 이해이다. 그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것이 ‘있는 것’이란 어떤 관계로 있기에 공간과 시간의 총체로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그려진 것은 언제나 어떤 것들 속에서 있으면 어떤 조건과 상황이라는 현실감을 갖는다. 그 현실감이 작품의 의미를 생성한다.
“예술은 형상form을 추상함으로써 대상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도달한다. 예술은 관계를 사물 속에 설정한다. 그러므로 그 설정을 통해서 그 <대상>에 도달하게 된다.” 대상에 도달한다는 것은 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이 아니라 표상으로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의 요소들이 드러나면서 작품의 의미를 이룬다. 그 의미란“순수하게 그리고 우둔하게 감각적인 사물 속에 내재하는 부분과 부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의 연관”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의미의 형성이란 연속적인 움직임 전체 속에서 운동과 운동의 관계 속에 주체가 개입하는 것이다. 남수정의 꽃은 이런 운동과 운동 사이에 있기보다 고정된 듯한, 이미 기호화된 꽃을 다시 감각화 하려 한다. 배경 없이 묘사된 꽃의 정지된 듯한 재현에는 사실적 묘사보다 더 깊이 주체가 개입하는 셈이다.
주체가 개입한다는 것은 대상을 대상으로 두지 않고 다르게 본다는 것이다. 그리기의 지각 방법이 작가가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자 세계를 보는 관점이다. 그 관점이란 사건으로서 의미이다. 세계를 그렇게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며 대상을 사물 자체로 보고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 주관으로 덮어 쓰인 객관, 의미 대상이면서 자아-소유로서 사물로 지각하는 것이다. 의미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순간, 개성이라는 이름의 예술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의 꽃은 최종적으로 대상을 자아-소유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며,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자아-소유를 안겨주는 셈이다.
 
내적 지시 대상인 그림을 보는 일은 취향이라기보다 세계를 보는 태도이자 가치판단이다. 무엇이 왜 그려졌는지가 그림을 이해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는 일차적인 태도 역시 다르지 않다. 사유 가능한 것과 실제로서 존재하는 것의 차이가 여기서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예술이란 근본적인 질문을 유도하는 것으로 실재에 가닿게 하는 것이라면, 현실로부터 일탈을 통해 사물의 다른 부분(작가나 보는 이의 무의식 혹은 결핍, 욕망)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면, 사유를 차단하거나 저지하는 그리기, 시간성이 표현되지 않아 현재로서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꽃이 던지는 남수정 다움이다. “우리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각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여기 지금으로부터 쫒겨나 표상된, 재-현재화된, 즉 이미 과거인, 죽은 추상적이지만 보편적인 관념적 공간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밀한 묘사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배경 없는 재현의 욕망은 감각보다 기호에 가깝고, 그 기저는 욕망을 욕망케 하는 장식적인 욕망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만일 배경 없이 대상이 자체만으로 있다면, 상황을 읽을 수 없다는 말이다. 상황이 없다는 말은 현실의 구체성을 상정하지 않은, 의미 불가능한 ‘물자체’로 있다는 말이다. 사건화 이전, 의미 이전의 사태로서 지각하기다. 그러나 방법으로서 의미 이전의 일반화는 위험하다. 예술작품을 두고 “모든 경우 그것은 추상될 수 없고 보편화 하지 못하고 가르칠 수 없으며 다만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지적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가치를 옹호하면서 어떤 실험도 용인하거나 어떤 행위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감싸기는 비일비재하다. 미학적 차원을 개인의 호응 정도로 전가해버려 장식이 미학으로 감싸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예술사는 실용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심미적인 높이에 도달하고 의미 또는 표현에의 관여가 지배적이 될 때 쇠퇴하였다가 다음에 다시 장식에로 복귀함으로써 부흥하고, 최종적으로 그 부흥이 성공하였을 경우 표현이나 의미가 비지배적인 것이 된다” 고 하지 않은가. 평면성이 강하고 시간성을 잡아내는 움직임보다 색채와 선이 만드는 형식이 두드러지는 꽃이다. 장식에로의 복귀가 현대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선호되고 있다는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의 꽃 그림 역시 현대미술이 당면한 우려에 가둬질 수 있다.
작품에서 의미의 형성이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예술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로에 있다는 통찰은 자아-소유로서 그림이 세계의 성찰과 신성(神性)에 대한 통찰로 이어져 있다는 말이다. 호도된 현대예술에 대항하려는 의지는 작품에 대한 정당화이자 의도하지 않은 장식화의 위험을 내성적 성찰로 이끄는 언제나 유효한 일이다. 예술 대신 심미주의의 환상 속에 살 수 없는 것이다. 실제보다 말의 현란함이 우세한 현대에서 지시대상이 너무나 허약하거나 허구가 되어버린, 재현으로서 언어(표현)의 세계를 그의 꽃으로 다시 생각해본다. 철학과 일상성이 없어지고 말이, 이미지가 이미지를 반복하는 참조대상이 몰락한 그 자리에 그의 꽃은 다른 호명은 아닐까. 아니 다른 호명이어야 한다. 




남수정 wind blow 270x180cm 장지에 먹과 분채



남수정 white butterfly 1 58x70cm 장지에 먹과 분채



남수정 blue bird 1 100x80cm 장지에 먹과 분채



남수정 blue bird 2 100x80cm 장지에 먹과 분채


남수정 early summer 1 50x65cm 장지에 먹과 분채


남수정 early summer 2 50x65cm 장지에 먹과 분채



남수정 just front rain 129x165cm 장지에 먹과 분채



남수정 early summer 3 50x65cm 장지에 먹과 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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