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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조작의 선구자 김종영의 인체조각

Kim Chong Yung

  • 작가

  • 장소

    김종영미술관

  • 주소

    서울 종로구 평창32길 30 (평창동)

  • 기간

    2020-03-27 ~ 2020-06-07

  • 시간

    10:00 ~ 18: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연락처

    02-3217-6484

  • 홈페이지

    http://www.kimchongyung.com

  • 초대일시

  • 관람료

    무료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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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의도

김종영 선생은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다. 그래서 인체를 소재로 한 선생의 조각작품에 관한 연구는 소홀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번 전시를 통해 두 가지 궁금증, 하나는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인 선생에게 인체는 어떤 의미를 지닌 모티브였는지, 다른 하나는 선생의 인체 조각과 추상 조각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선생은 브랑쿠지를 ‘추상 작가로서 투철한 지성이 부족한 것이 유감’이라 평했다. 우리는 지금도 비구상과 추상을 혼용하고 있다. 추상은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다. 선생은 모든 이해는 추상화를 수반한다고 했다.
 
선생은 말년에 쓴 「자서 自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무엇을 만드느냐 보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집중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자연 만물을 관찰해서 보편적인 조형 원리를 찾고자 매진했다. 그러한 원리에 따라 제작한 작품은 모든 사람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으므로, 시공을 초월해 공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조각가였기에 첫 번째 탐구 대상은 인체였다. 이후 탐구 대상은 점차 화초, 나무, 산, 동네 풍경 등 주변의 모든 것으로 확장되었다. 선생은 사십 대까지 다양한 실험을 거쳐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이를 종합해서 보편적인 조형 원리를 찾고자 했다. 선생의 집요함은 마치 세잔이 눈에 보이는 사과가 아닌 사물로서 가지고 있는 ‘사과성’을 그리고자 했던 것과 같다. 이는 필연적으로 관례를 재검토하고 추상화를 수반했다.
한편 선생은 평생 서예에 정진했으며, 추사 선생을 스승으로 숭앙했다. 그만큼 선생은 서예에 정통했다. 선생은 남들이 괴이하다고 하는 추사 선생의 예서체 글씨를 극찬했다. 이를 토대로 추사체와 세잔의 그림을 비교하여 보편적인 조형 원리를 살폈다. 그 결과 조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이며, 유기적인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원리는 asymmetry, 즉 비대칭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모티브가 인체에서 시작해서 자연으로 확대되며, 선생의 후기 작품에는 각각의 소재였던 나무, 식물, 산, 동네 풍경 등이 한 작품에 종합해서 응축적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미술관 로비에 있는 있는 『작품 81-4』이다. 이 작품에는 인물과 나무 그리고 삼선교 풍경과 종교적 도상까지 모두 담겨 있다. 제3의 자각상으로 불리는 『작품 80-5』를 통해서는 선생님이 지향한 『不刻의 美』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다.
 
서구인들이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각의 모티브로 인체에 접근했다면, 선생은 동양적인 자연관에서 인체를 모티브로 삼았다. 따라서 선생에게 자연은 nature의 번역어라기보다는, 한자 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존재이다. 변함없는 자연은 한결같기에 성실함 그 자체이고, 성실함을 통해 삶의 도리를 깨칠 수 있다. 이것이 선생의 인체 조각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었다.


■ 전시 내용

○ 김종영미술관 본관 - 2,3,4 전시실

본관 전시는 김종영 선생의 인체조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는지 그 변화를 개괄할 수 있도록 소재와 시기별로 구별해서 전시했다.

[본관 2전시실] : 『가족, 보편적 조형 원리의 모색을 위한 출발점』
김종영 선생이 생전에 특정인을 모델로 제작한 작품은 한 손에 꼽을 수 있다. 할머니, 어머니, 부인, 그리고 본인이다. 그 외에는 지금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입구에 있는 현제명 흉상과 소녀상이 유일하다. 김종영 선생은 1941년 12월 8일 결혼 후 가족과 자신을 모델로 수많은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조각가였기에 인체는 조형 연구를 위한 첫 번째 탐구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941년 결혼 후 1948년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부임하기까지 창원에 칩거했던 선생께 가장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던 분은 다름 아닌 부인이었다.
 
[본관 3전시실]: 『동양과 서양의 비교, 보편적 조형 원리의 모색을 위한 실험』
대부분 선생의 40대 작품들이다. 선생은 1953년부터 1963년까지, 그러니까 40대를 서구 동시대 미술과 추상미술 연구에 매진했다. 평생지기였던 박갑성 선생은 1953년 피난 중 부산 송도 임시교사 시절이 선생에게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었다고 회상한다. 구상에서 추상 조각으로 전환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실례로 1953년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조각 콩쿠르 입상작 『여인 나상』과 그해 제2회 국전에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 작품인 『새』를 출품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선생은 서예 공부법인 임서 臨書 하듯이 다양한 유파의 작품을 탐구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59년 월전 장우성과 함께 개최한 2인전이었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든 다양한 작품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40대에 그린 수많은 드로잉 작품과 노트를 살펴보면 선생이 얼마나 폭넓게 연구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55년에 딸을 그린 그림과 1958년 44세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입체파에 대한 이해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한편 1958년 작품인 자화상과 둘째 아들 그림은 모두 미술대학 교내미전 초대장 뒷면에 그린 작품으로, 전쟁 후 물자가 귀하던 시절 청빈한 삶 속에서 온전히 작업에만 매진한 선생의 열정을 짐작하게 된다.
 
[본관 4전시실]: 『추상화 抽象化, 보편적 조형 원리의 모색을 위한 방법』
선생이 생전에 제작한 여인입상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몇 점 안 된다. 처음 제작한 입상은 1953년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를 위한 국제조각 콩쿠르 입상작인 『여인 나상』이다. 마지막으로 제작한 여인입상은 『작품 74-1』이다.
1953년에 제작한 또 다른 여인입상 『작품 53-1』과 『작품 74-1』을 비교해보면 20년이라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상념에 잠긴 멜랑콜리 도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는 작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감지된다. 변화는 다름 아니라 고뇌하던 여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희구하는 듯하다는 점이다.
 
1967년 선생은 오랜만에 가족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부인과 아들은 한지가 아닌 스케치북에 그렸음에도 서양의 명암법이 아닌 동양화의 농담법과 유사하게 그린 점이 눈에 띈다. 한편 어머니와 1961년 작인 아들 그림을 통해 서예에서 체득한 필력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선생의 드로잉 작품 중 최고의 필력을 보여준 작품은 1974년 작인 『북한산』이지 않을까 싶다.


○ 김종영미술관 신관 - 1,2,3 전시실

신관 전시는 조각가이기에 인체에서 출발한 선생 작품의 추상화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신관 3전시실]: 『비대칭과 불각의 미, 특수성에서 발견한 보편적 조형 원리』
선생은 1950년대 중후반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추상미술이라는 제목의 연구 노트에서 브랑쿠지를 “고립적으로 극도로 단순화한 형체로 조각하여 독특한 난형 卵形의 양감을 살린 작품에서 입체파 조각과는 다른 새로운 조각 분야를 개척”한 작가로 분류했다. 그리고는 평하기를 “청신한 소박성”이 있어 “그 독창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으나, 다소 신비주의적이고 추상 작가로서의 투철한 지성 知性이 부족한 것은 유감”이라 했다.
추상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다. 한편 선생은 “모든 이해는 추상화를 수반한다.”라고 했다. 바꿔말하면 조각가인 선생에게 추상화는 대상들을 분석해서 추출한 공통된 특성을 시각화하는 고도의 지적인 행위로, 궁극적인 목적은 이해하는 것이다. 선생은 이를 한마디로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라 했다. 선생이 보기에 브랑쿠지는 이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인체를 소재로 한 선생의 작품 가운데 이 같은 추상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 있다면, 단연 ‘세 번째 자각상’이라 불리는 『작품 80-5』라고 할 수 있겠다.

[신관 2전시실]: 『 自然中 有成法, 김종영의 예술 노트 』
선생이 예술을 통해 지향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서예작품은 『自然中 有成法』과 1967년에 쓴 『判天地之美 析萬物之理』이다. 自然中 有成法, 즉 스스로 그러하게 있는 가운데 이루는 법이 있다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判天地之美 析萬物之理는 『장자 莊子』 「천하 天下」편에 “천지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判天地之美, 만물의 이치를 분석하며 析萬物之理, 고인의 전일함을 관찰한다 察古人之全”란 구절의 일부이다. 自然中 有成法을 통해 선생의 조형관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고, 判天地之美 析萬物之理를 통해서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확인 할 수 있다.
진열장에는 노트 두 권과 스케치북 한 권이 있다. 한 권의 노트는 1950년대 중후반 선생이 서양 추상미술의
기원과 흐름을 연구하며 작성한 『Abstract Art』라는 제목의 노트이며, 다른 한 권은 『수상 隨想』이라는 제목으로 1955년 11월에 작성한 노트이다. 『Abstract Art』에서 선생의 브랑쿠지에 대한 평을 살펴볼 수 있다. 『수상 隨想』에는 선생이 어떤 작품을 제작하고 싶은지 자신의 진솔한 바람과 거기서 비롯되는 과제를 함축적으로 기록했다.
전시된 스케치북에는 모두 15장의 나무 그림이 있다. 선생은 1958년 1월 낙엽 진 나무를 그리고 왜 나무를 관찰하는지 그 이유를 메모로 남겼다. 뒤로 갈수록 마치 몬드리안의 추상화 여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선생은 앞서 살펴본 서예 공부법인 임서의 세 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관 1전시실]: 『 인체를 넘어서, 모티브의 확장을 통한 한국 조각 예술의 지평 확장』
선생은 예술이란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함에도 조각의 모티브가 인체로 한정된 것에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서양 추상미술을 접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여러문제, 특히 20세기 한국미술의 과제인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이룰 가능성을 발견했다. “보편성에 기반한 특수성만이 세계문화사의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글로컬리즘 Glocalism”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우리의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추상화라 할 수 있다.
서양 조각을 공부하며 선생에게 첫 번째 탐구 대상은 필연적으로 인체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선생에게 자연은 인간에게 영원한 스승이었다. 마치 사군자가 단순한 식물이 아니듯이 말이다. 따라서 관찰대상은 자연으로 확대되었다. 마치 선비들이 자연을 통해 삶의 도리를 깨치듯이, 조각가인 선생도 자연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며 조형 방법을 탐구했다. 그 결과 조각의 모티브는 다양해졌다.
선생은 주변의 가족, 꽃, 나무, 산, 동네 풍경 등 모든 것을 관찰했다. 관찰을 통해 분석하고 원리를 터득하기 위해 선생은 계속해서 그렸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남겼다. 40대까지 실험에 전념한 선생은 50부터 실험 결과를 종합해서 당신의 조형 이념인 ‘불각의 미’를 구현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자각한 것이 ‘구성의 중요성’이며, 조각에 생명감을 불어 넣어주는 ‘Asymmetry’, 즉 ‘비대칭’이다.

1전시실에 전시된 작품들은 인체에서 비롯된 것같이 보이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유기체 형태의 작품은 인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 작품은 인체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모티브에서 비롯된 여러 작품의 에센스가 종국에는 작품 하나에 종합되었다.
본관 로비에 설치된 『작품 81-4』를 살펴보면 인체 두상 같기도 하고, 군상 같이 보이기도 하며, 웅크리고 앉아있는 사람 같이 보이기도 한다. 또한, 삼선교 풍경 같기도 하고, 선생이 말년에 귀의한 가톨릭의 십자가 같이 보이기도 한다. 또한 환조와 부조가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이다.
이와 대조되는 작품이 신관 1전시실 입구에 있는 초록색의 『작품 79-5』이다. 형태로만 봐서는 마치 20세기 초 절대주의 작품 같기도 하고 1960~70년대를 풍미한 미니멀리즘 작품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종종 선생이 지향한 ‘불각의 미’를 서양의 미니멀리즘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단순한 만큼 이 작품은 어떤 모티브에서 비롯되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그나마 초록색으로 인해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생의 채색 조각작품의 연원을 고려하면서 이 작품을 보면, 자연은 원과 원통 그리고 원뿔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한 세잔의 조형론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사상 捨象한 결과물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제재소에서 켜온 것이 아니라 손으로 면을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각가로 선생의 여정은 세잔이 관습에 젖은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고 온전히 사물 자체로서 사과가 가지고 있는 ‘사과성’을 그리려고 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하겠다. 그렇다고 선생이 ‘사과성’을 그리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세잔이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과 한 알을 가지고 자신의 화두에 집중해서 현대회화의 물꼬를 튼 것과 같이, 선생은 시류와 거리를 두고 조각가로서 자연을 관찰하며 자신의 화두에 집중한 결과 20세기 한국미술계의 과제, 즉 당당하게 세계 속의 한국미술로 존재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였다. 그 출발점은 인체였다. 선생의 작업 여정은 가히 20세기 한국 조각사에서 독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전시장 전경과 작품 이미지


전시 전경


전시 전경


전시 전경


전시 전경

  
작품74-1A, 브론즈(원작:), 1974, 19×17×71cm                                                                        여인입상 , 나무, 1965, 18×19×106cm

  
작품75-11, 돌:익산대리석, 1975, 18×9×29cm                               작품78-20, 나무, 1978, 32×26×62cm

   
작품78-28, , 1978, 20×14×27cm                                                                                                 부인상, 나무, 1950년대초 , 15×9×23cm

  
드로잉, 1958. 10, 종이에 크레용 , 15x21cm                                       드로잉, 1955, 종이에 먹 · 수채, 35x42cm


 
드로잉, 1970년대, 종이에 먹과 사인펜, 25x35cm                                   드로잉, 연도미상, 종이에 먹,펜,수채, 38x5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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