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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OCI 영 크리에이티브 선정 작가
조해나 개인전 '유사위성'

2020 OCI Young Creatives, Haena Cho

  • 작가

  • 장소

    OCI 미술관 1층 전시실

  • 주소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 기간

    2020-06-16 ~ 2020-07-11

  • 시간

    9:00 ~ 9:00

  • 연락처

    02-734-0440

  • 홈페이지

    http://ocimuseum.org/

  • 초대일시

  • 관람료

갤러리 가기
2020 OCI YOUNG CREATIVES 선정 작가

조해나, 송수민 개인전 개최

OCI미술관(관장 이지현)의 신진작가 발굴, 지원 프로그램인 2020 OCI YOUNG CREATIVES 의 선정 작가 6명이, 6월 16일부터 9월 26일까지 약 3개월여에 걸쳐 개인전을 연이어 개최한다.
 
선정작가 : 박윤지 송수민 정덕현 정수정 정해나 조해나 
  

OCI YOUNG CREATIVES는…
만 35세 이하의 젊은 한국 작가들을 지원하는 OCI미술관의 연례 프로그램이다. 매년 여름 공개모집을 진행, OCI미술관 학예팀과 외부 전문가를 초청하여 3차례 이상의 심사를 통해 선정한다. 선정 작가 전원에게 각 일천만 원의 창작지원금과 이듬해 OCI미술관에서 개인전 개최의 기회가 주어진다. 또한 OCI미술관 큐레이터의 전시 기획, 전문가와의 1:1 평론가 매칭, 리플렛 제작 및 온/오프라인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대외 홍보, ‘작가와의 대화’를 비롯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 등 OCI미술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오는 7월, 12회 공모를 앞둔 본 프로그램은, 매회 평균 50:1이 넘는 높은 경쟁률 속에 지금까지 총 73명의 작가를 배출했다.
 


불시착  parachute, analog television, video   |   dimensions variable, 4' 50″   |   2020
 


유사위성
- 창백한 지평선 위로 구부러진 빛의 메아리

○ 2020 OCI Young Creatives 선정 작가 조해나(1988-)의 개인전
○ 실패와 좌절에 굴하지 않고, 늘 궤도 탈출을 꿈꾸는 유사위성의 도전기
○ 사진, 영상, 키네틱, 음향 등 다양한 매체로 삶의 통찰을 조각
○ 얼핏 위성처럼 보이는 유사위성, 얼핏 진짜처럼 보이는 유사 메커니즘

“가지런히 늘어선 형광등이 켜진다. 차례대로 하나씩, 곧이어 여기저기 점등과 소등을 반복한다. 종종 리듬감이 느껴진다. 무슨 순서라도 있는 걸까? 한참을 갸웃거리다 다른 작품으로 눈을 돌리는 찰나, 문득 이상하다. 저 프로젝터는 왜 형광등을 비추고 있지?”


안정적인 상황을 뜻하는 말로 ‘궤도에 올랐다’가 있다. 궤도에 오른 위성을 바라보며, 타성에서 벗어나려 공명하는 ‘유사위성’의 칠전팔기가 전시장에 펼쳐진다. 바로 6월 16일부터 7월 11일까지 종로구 OCI미술관(관장 이지현)에서 열리는 조해나 작가의 개인전 《유사위성》.
 
OCI미술관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 2020 OCI YOUNG CREATIVES 여섯 선정 작가가 오는 6월부터 총 약 석 달에 걸쳐 차례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 첫 전시인 조해나의 이번 개인전은 사진, 영상, 키네틱, 음향 등 다양한 기술 매체의 작용 양태에서 삶의 통찰과 철학을 발견하는 사색의 시간이다.


선팽창 fluorescent lamps   |   127×120㎝   |   2020


간헐적인 잡음이 들린다. 바닥의 TV에 묶인 낙하산이 펄럭이고 표면엔 영상이 흐른다. 빙글빙글 도는 선풍기는 날개 대신 전구를 달고, 바람 대신 빛을 불어댄다. 그림자는 빙글빙글 돌며 늘었다 줄었다 기울었다 부지런히 변한다.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모니터는 풍차처럼 빙빙 돈다. 그런데 모니터 속 화면은 돌지 않아, 의외로 보기에 불편하지 않다


사건의 지평선 mixed media, video  |  50×115×190㎝, 9’ 50”  |  2020


수많은 장치들은 일종의 ‘척’ 놀이를 한다. 모니터 속 화면은 ‘돌지 않는 척’ 모니터와 반대 방향으로 부지런히 돈다. 레일을 왕복하는 소리쇠는 서로 닿지도 않으면서 스칠 때마다 ‘닿은 척’ 소리를 낸다. 전원도 넣지 않은 형광등은, 프로젝터의 빛을 받아 짐짓 켜진 행세를 한다.


흔적의 공백 mixed media, video   |   5’ 40”   |   2020


‘동시녹음’이란 용어가 있다. 화면(시각)-음향(청각)을 동시에 기록해, 단일한 채널로 출력하면 싱크를 맞추기 편할 것이다. 그런데 조해나는 설치 시간의 대부분을 이 ‘싱크 맞추기’에 투자했다. '서로 별개의 채널이면서 단일인 척하기'는 이 전시를 꿰뚫는 메커니즘이다. ‘동시녹음’이 ‘위성’이라면, ‘싱크 잘 맞춰 동시녹음인 척하기’는 '유사위성’에 해당하는 셈이다. 탈출을 시도하지만 완전하진 못한 탓에 결국 위성과 유사하게 떠돈다.
 

Title,  fan, mixed media   |   dimensions variable   |   2016


‘궤도’는 안정성을 보장하는 제도권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항거할 수 없는 규범에 사로잡힌 처지이거나, 곡절이 있어 선뜻 발을 뺄 수 없는 일종의 볼모 신세이기도 하다. 선망의 대상이면서 또한 벗어나고픈 족쇄인 셈이다. 밤하늘의 애증 관계는 인간 세상의 신세타령으로 오늘도 이렇게 승화한다.


조해나(Haena Cho, 1988-)는 서울시립대학교에서 환경조각 학사 및 석사를 취득했다. 사진, 영상, 키네틱, 음향 등 다양한 형태의 뉴미디어 매체를 재료 삼아 인문사회적 통찰을 조각한다.
2020년 OCI미술관 개인전 《유사위성 - 창백한 지평선 위로 구부러진 빛의 메아리》에서는 종전의 개인전 《타원궤도》, 《궤도공명》, 《탈출속도》에 이어지는, 인간 세상과 우주의 싱크를 확인할 수 있다.

학력
2017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 석사
2013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 학사
  
개인전
2020     유사위성, OCI미술관, 서울
2017     탈출속도, space9, 서울
2016     궤도공명, 팔레드서울, 서울
           타원궤도, 갤러리 정미소, 서울
 
단체전
2019     APAP6, 공생도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안양
2017     Seoul Media L__og, NOMAD AIR, 오슬로, 노르웨이
           ART UP SEOUL, 청계천, 서울
           Lappland de 13, Lappland de, 서울
           A=A’, 바움아트갤러리, 서울
2016     WATT, 아트스페이스 와트, 서울
2015    바림 레지던스 2015 해외작가 발표전 Part1, 바림, 광주
           O’NEWWALL MAYFEST 2015 BYOB Seoul, 스페이스오뉴월, 서울
           Sea Gate出海口, 보얼예술특구, 가오슝, 대만
           PAIR Open Studio, 보얼예술특구, 가오슝, 대만
2014     오십개의 방 오만가지 이야기, 경기창작센터, 안산
2013     전시중, 빨간벽돌갤러리, 서울
          배다리_사이클 결과보고전, 스페이스빔, 인천
          The 3rd Scout展, 갤러리이마주, 서울
 
수상 / 선정
2020     2020 OCI YOUNG CREATIVE
2017     아르코 해외지원 사업 NOMAD AIR, 오슬로, 노르웨이
2015     바림 레지던스, 바림, 광주
2014-5   Pier2 Artist Residency, 보얼예술특구, 가오슝, 대만
2014-5   경기창작센터 기획 레지던시, 경기창작센터, 안산
2013     배다리_사이클, 스페이스빔, 인천


[전시 서문]
공간을 채운 음향과 전자 기기의 숨결, 거듭 깜박이는 조명, 필름 너머로 일렁이는 패널 속 영상, 펄럭펄럭 빙글빙글 왔다 갔다 저마다 바쁜 키네틱 장치들… 눈앞에 번뜩이는 디지털 문명의 향연으로 이미 벅찬 숨통을 마저 죄는, ‘주기, 탈출속도, 위성, 공전, 사건의 지평선…’등 천체물리학 용어의 난무. 조해나의 공간은 일견, 선뜻 다가서기 조심스러울 수 있다.
 
껍질이 굳을수록 살이 연하고, 무뚝뚝할수록 알고 보면 다정하다. 별을 보는 조각가. 그는 첨단 기술에 별다른 안면도 연줄도 없는, 지극히 ‘아날로그스러운’ 정통 조각가이다. 돌이나 비누, 쇳덩이나 합성수지보다 조금은 더 천방지축 유난한 재료로 빚은, 우리가 사는 이야기이다. 별이든 별 같은 이든, 우주에서나 사회에서나 눈부시기론 매한가지이고, 둘레를 어슬렁대는 위성은 얻어 쬐는 별빛 한 줌에 길들여진 고분고분한 친구들이다. 그럼 ‘유사위성’은 팔자 한 번 벗으려 몸부림치다 엉성하게 궤도가 꼬여 버린 신세쯤 될까? 설령 신세를 벗어날 탈출 속도를 잘못 계산한들 낙하산 하나면 끝이 아니다. 우아한 불시착은 또 다른 탈출을 꿈 꿀 기회이다.
김영기 (OCI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평론]
  

속한 것도 속하지 않은 것도 아닌 채 끝없이 공명하기
 
 전시 초입에 놓인 선풍기 설치 < Title >(2016)에서 시작해 보자. 날개 대신 조명 램프를 단 선풍기 아래 투명한 아크릴판으로 제작된 ‘유사 위성’이라는 글자가 놓여 있다. 선풍기가 회전함에 따라 글자는 보였다 안보였다 길어졌다 짧아졌다를 반복하며 전시장 전체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유사 위성’은 위성처럼 보이지만 위성이 아닌 천체를 지칭하는 용어다. 유사 위성(준위성)은 겉보기에 행성 주변을 공전하는 위성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주기적으로 중력적 영향으로 가하는 궤도 공명 때문에 행성에 접근하거나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온전히 궤도에 속한 것도 아니고 속하지 않은 것도 아닌 불완전한 상태를 보인다. 조해나가 이 개념을 도입한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며 궤도 안일수도 밖일 수도 있는 불확실한 상태가 물리적이든 사회적이든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사고에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어떤 궤도에 머물러 있는가?”(작가) 사회적 관습과 물리적 공간의 한계에 묶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는 대로 현상을 받아들이곤 한다. 똑같은 방식을 재생산하는 삶은 차이 없는 반복으로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삶이다. 조해나는 현상과 실체의 불일치를 가시화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거나 의심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유사 위성이라는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라 허상(그림자)이고, 그마저도 고정되지 못하고 빛의 운동에 따라 끊임없이 요동친다. 찰나의 환영일 뿐인 이미지는 안정된 실체에 대한 인지를 뒤집고 “공간과 공간 사이의 모순된 지점”(작가)를 열어젖힌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궤도에서 벗어날 듯 말 듯 이어져 있는 궤도 공명의 모티프는 미시적으로나 거시적으로 전시 전반에 반영되어 있다. 우선 출품작 다수는 물리적으로 회전하거나 왕복하는 궤도 운동의 포맷을 취하고 있고, 그중에서 직접적으로 행성 혹은 위성의 공전 관계를 형상화한 작업도 여럿이다. 대표적으로 전시 제목과 동명인 <유사위성>(2020)이 있다.이 작업은 항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천체들의 움직임을 가시화한다. 태양을 상징하는 전구 달린 선풍기를 중심으로 6m의 직선 레일이 대칭을 이루며 설치된다. 각 레일에는 진자운동을 반복하는 전구 달린 선풍기와, 금속 구슬이 회전 운동을 반복하며 경사도를 바꾸는 쟁반이 각각 하나씩 달려 있다. 태양 역할의 선풍기가 쏘는 빛이 큰 궤도를 이루며 그림자 운동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각 위성들도 여러 층위의 궤도들을 발생시킨다. 레일의 이동에서 Z축의 왕복운동이 발생하는 한편, 선풍기의 전구가 바닥을 빗자루 쓸 듯 훑으며 지나가는 빛의 X축 왕복운동, 수평을 맞추려고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우는 쟁반의 Y축 왕복운동, 쟁반 내부에서 일어나는 구슬의 XZ 평면 회전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각자의 궤도를 만들며 교차한다. 이들은 서로의 모습을 흉내내며 모종의 궤도 공명 상태를 창출한다. 넘어질 듯 말 듯 뒤뚱뒤뚱 걷는 아이처럼 물질적 운동과 비물질적 운동(빛의 궤적)이 교차하며 일종의 내적-작용(intra-action)을 구현하는 것이다. 한편 청각적 상호작용을 형상화한 <청색이동>(2020) 역시 천체의 공전을 시각적으로 차용한다. 각각 드럼 스틱과 심벌즈를 상징하는 두 위성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소리의 발생과 전달을 가시화한다. 소리가 공기라는 매질을 밀면서 전달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거리를 좁혔다 넓혔다를 반복하는 장치의 왕복운동은 소리를 만드는 장의 작용을 은유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체의 운동이 계를 구성하는 다른 개체들과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상황과 관점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햇살 좋은 유리창 앞에 놓인 물병이 외견상으로는 정적인 정지 상태로 보이나 분자적 차원에서는 증발과 응결이 교차하는 동적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고, 그 양상이 습도나 온도, 압력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도 같다. 조해나의 이런 관점은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구분하고 고정된 물질 개념을 상정하는 서구 형이상학에 거부하는 철학적 흐름들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나 화이트 헤드(Aftred North Whitehead)의 실재와 과정의 연결, 캐런 바라드(Karen Barad)의 내적-작용 개념 등이 일례다. 현상과 무관한 개체의 존재를 부정하며 측정 대상뿐 아니라 관찰 행위, 측정 장치까지 서로 내적-작용을 하며 현상을 발생시킨다는 캐런 바라드의 주장은 작품 하나하나를 유기체로 보고 전시장 전체를 유기체들이 서로 공명하는 역동적인 장으로 만들고 싶다는 조해나의 말과 공명한다.

 사물이 상호작용하며 겉보기와 다르다는 궤도 공명의 모티프는 물리적 운동이 아닌 영상 작업에서도 또 한 번 변주된다. <선팽창>(2020)은 유머러스하고도 재기발랄하게 가장(disguise)의 전략을 도입한다. 얼핏 댄 플래빈(Dan Flavin) 유의 형광등 작업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선팽창>은 실상 형광등의 폭에 맞춰 디자인된 프로젝션 매핑이다. 관객은 형광등에서 불가능한 현란한 패턴을 보고서야 이 영상이 형광등 자체의 빛이 아니라 그것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뒤늦게 알게 된다. 영상과 물리적 운동을 결합한 <사건의 지평선>(2020) 역시 보이는 것이 실체와 다르다는 인지의 간극을 이야기한다. 회전하는 모니터를 보는 관객은 처음에 그저 모니터가 돌아가나보다 정도의 생각을 하다가 영상이 회전하는 속도와 모니터의 회전 속도가 엇박이 나면서 이 장치의 구동 원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모니터는 0.75 RPM으로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고, 영상은 0.75~4.5 RPM으로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다. 모니터의 속도와 영상의 속도가 잠깐 일치하는 순간 속도는 상쇄되어 영상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선팽창>이 물리적 회전을 영상에 접목했다면, 4개로 구성된 영상 연작 공백 시리즈는 영상 내부의 언어로 경계 흐리기에 도전한다. 시작과 끝이 모호한 채 끝없이 루핑되는 영상들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흐르는 움직임들을 담고 있다. 위아래 방향으로 이어지는 자동차의 운동, 좌에서 우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파도의 운동, 화면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흘러가는 구름의 운동은 일면 원테이크로 찍은 스트레이트 필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이 영상의 시공간은 연속적이지 않다.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운동은 50-60개가 넘는 개별 영상의 단편들을 이어 붙인 영상 ‘조각’이다. 연속으로 보이는 외양 아래 비연속적 단절들을 내포한 영상은 영상에 대한 통념을 조용히 전복시킨다. 한편 이 작업은 사진과 영상의 경계도 슬며시 지운다. 앵글이나 피사체의 변화 없이 느리게 움직이는 영상은 앤디 워홀의 < Empire >(1964)처럼 본성상 ‘움직이는 그림(live painting)’이다. 더욱이 <빛의 공백>의 경우 겹친 영상의 잔상이 남아 있어 서로 다른 시공간의 접합이 훨씬 강조된다. 동영상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움직이지 않는 배경과 빠르게 움직이는 도로의 대비 또한 같은 이미지 안에 사진과 영상이 공존하는 있는 것 같은 착시마저 일으킨다.
 궤도를 한 바퀴 돌았으니 전시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불시착>(2020)으로 되돌아가자. 낙하산 위에 영상을 프로젝션한 이 작업은 물리적 추락과 부유하는 의식의 흐름을 결합한다. 고공에서 바라본 지상의 풍경,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 낙하산의 끈이 흔들리며 달라지는 시야 등이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작업 역시 현상과 실체 사이에 간극이 있다. 추락의 방향과 반대로 갈수록 지상에서 멀어지게 역재생시킨 푸티지나, 실제 소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움직임이 야기한 전자기파를 소리로 전환한 음향은 모두 매끈한 환영을 깨는 각성의 빨간 약이다. 신호인지 잡음인지가 한 끗 차이인 아날로그 티비처럼 의도된 착륙인지 불시착인지도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아하게 착륙했다 한들 길게 보면 불시착일 수도 있고 잘못 도착했어도 그것이 몰랐던 길을 열어주기도 하니 말이다. “현재 우리는 어떤 궤도에 머물러 있는가?”에서 출발한 조해나의 여정은 보는 자에게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존재론적 질문을 촉발한다. 확실한 것은 없다. 그저 당신이나 나나 작품이나 끊임없이 공명하며 위태롭게 각자의 궤도를 그릴 뿐이다. 
문혜진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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