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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부산현대미술관 동시대미술기획전 - Emotion in Motion 전

Emotion in 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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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내용

중세 기독교 전통의 미술은 신성(神聖)을 표현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했다. 그래서 날개 달린 천사나 중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성인(聖人)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묘사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미술은 시각 대상이라기보다는 신앙심을 표현하거나 확인하는 제의적(祭儀的) 산물이었다.
미술이 시각(視覺)의 중요한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에 대한 재현과 모방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랑스 리얼리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는 진실되고 정직한 표현만이 살아있는 그림을 완성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라고 선언한 것은 당시 리얼리즘 화풍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한마디로 요약해 주는 단서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하게 다가오는 리얼리티(reality)는 무엇일까?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도시에 철도가 놓이고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뿜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구가 발명되어 도심의 밤을 인공조명으로 훤하게 밝혔다. 이 생경한 모습을 목격하게 된 근대의 유럽인들은 이 경이로운 광경에 매료되었다. 과학의 발달은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특히 카메라의 발명은 ‘재현’의 문제에 신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근대문명에서 리얼(real)과 팩트(fact)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철학의 문제를 낳았다.
아티스트들도 이러한 세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미술계는 ‘역동성’이라는 새로운 모티브를 받아들게 되었다. 말이 달리고, 전구가 휘황찬란하게 불 밝힌 카페의 모습도, 발레리나가 아름답게 춤을 추는 모습도, 플랫폼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들어 오는 증기기관차도 바로 그 역동성의 대표적인 주제였다. 하지만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움직임’자체가 아니라 그 움직임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이라는 은유나 움직임의 찰나를 포착한 정지된 한 장면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그럴듯함’이 리얼리티를 보증해 주었던 것일까?
오늘날 동시대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에 아티스트들이 고민했던 그리고 목표했던 많은 것들이 해결된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미술의 중요한 문제의식에서 저만치 멀어졌고, 움직임은 실제로 가능한 재현이 되었다. 실제로 움직이는 작품은 움직임 자체에 대한 구현이 목표도 아니며, 역동성만을 재현한 것도 아니다. 영화의 발명은 시각의 재현을 넘어 시간의 재현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구현되는 첨단의 현대미술은 현대 과학기술의 척도를 보여줄 수 있지만 오히려 자연에 대한 향수와 현대문명이 예단치 못한 이기(利己)의 위험을 경고하기도 한다. 이제 예술은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인공 기계문명의 역동적인 새로운 풍경에의 찬탄과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방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예술의 이미지는 이제 서로가 눈을 맞추고 서로가 대상화한다. 인공의 것이 자연의 것처럼 움직임과 표정을 가지게 됨으로써 새로운 감성을 감지하고 소통한다. 영화나 사진의 광학적이고 기계적 매개 결과가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여 울게도 웃게도 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이제 어떤 운동, 행위나 표정은 근대인들이 목격한 생경한 것들의 경이로움이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를 함의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움직임’은 감성이나 인식의 표상체가 된다. 기호학(Semiotics)은 이 표상체가 가지는 기표(記標 Signifiant) 를 분석함으로써 현대사회의 풍요로운 사회적, 문화적 의미(기의 記意 Signifié)를 번역해 준다. 예컨대 우리의 제스처가, 화장과 성형이, 패션과 과잉된 욕망의 다양한 기호품들이 우리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또 다른 언어의 체계를 갖는다.
 
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그 컨텐츠의 움직임(행위 motion), 표정이 우리에게 어떤 감성을 자극해 특별한 표상체가 되는 작품들이다. 우리는 부족한 형용사들을 나열하게 될 것이고 또한 특별한 표정과 움직임으로 대응할 것이다. 이러한 대상에게서 받은 자극이나 간섭으로 발생되는 변화는 풍부한 사회언어를 (재)생산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말하는 ‘작품’은 단순히 기표(시니피앙)만이 아닌, 동시에 기의(시니피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호들의 삶에 주목하는 것은 움직임이 암시된 작품들을 통해 특별한 감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된다. 이제 작품들이 그들의 몸짓으로 들려주는 감성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전시작품 이미지


김현명 作 <기억하는 회로들>, 4채널 영상, ed. 1/1, 2020




KEEN 作 <아무도 살지 않는다.>, 공간의 가변설치,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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