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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에 물든 푸른빛>

The beauty of blue and white porcelain

  • 작가

    이승희

  • 장소

    코리아나미술관

  • 주소

    서울 강남구 언주로 827 (신사동)

  • 기간

    2020-08-20 ~ 2021-02-06

  • 시간

    10:00 ~ 19:00 (휴관일 : 일요일, 성탄절, 추석 명절연휴 휴관)

  • 연락처

    02-547-9177

  • 홈페이지

    http://www.spacec.co.kr

  • 초대일시

  • 관람료

    성인 4,000원, 대학생 이하 3,000원, 10명이상 단체 1,000원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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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나 화장박물관 <백자에 물든 푸른빛>전 개최
 
코리아나 화장박물관(관장 유상옥·유승희)은 조선시대 백자의 꽃으로 불리는 백자청화 소장 유물과 현대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백자에 물든 푸른빛> 전시를 8월 20일부터 2021년 2월 6일까지 개최한다.

 
백자에 담은 푸른빛 그림
 

우리의 일상은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어 있고, 색은 우리 삶에 많은 부분을 함께하고 있다. 
예로부터 흰색은 청렴결백과 절제, 청색은 희망, 생명, 성장 등을 뜻하며 오래전부터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아 의식주에 두루 사용되었다.
 
전통 공예품 중에서 흰색과 푸른색의 조화가 돋보이는 것으로 흰색의 자기 위에 푸른빛의 그림이 그려진 백자청화白磁靑畵를 꼽을 수 있다. 조선 초기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왕실은 검소와 절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백자白磁를 왕실의 그릇으로 정하면서 백자 제작 기술이 급속하게 발달했다. 14세기 백자 위에 푸른색 안료로 그림을 그린 백자청화가 중국으로부터 전해지자 왕실과 상류층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조선시대 백자청화는 왕실용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관요官窯 체제를 통해 생산 및 관리되었고, 당시 중국을 통해 수입하던 값비싼 청색 코발트 안료인 회회청回回靑을 이용해 도화서圖畫署의 전문 화원畫員들이 그림을 그렸다. 백자청화는 조선시대 백자의 꽃으로 왕실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조선 후기에는 사회·경제 상황의 변화와 함께 관요의 민영화, 수요층의 확대 등으로 형태와 문양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이번 전시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의 스물여섯 번째 기획 전시다. 전시에는 의례, 제례, 일상생활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던 백자청화 관련 유물 60여 점이 현대 작가의 작품과 함께 선보인다. 백자청화를 통해 투영된 조선시대 선조들의 운치韻致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백자에 물든 푸른빛> 전시에는 도자기를 평면 부조 방식으로 재현하는 작업으로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도자 회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는 이승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소장 백자청화 유물과 작가의 평면 회화 작품을 통해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에 새롭게 재해석된 백자청화를 볼 수 있다. 전시장에는 경기도자박물관의 백자청화 영상을 통해 조선시대 백자의 발전을 바탕으로 꽃피운 백자청화의 제작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슈링클스를 이용한 백자청화 마그넷 만들기> 체험프로그램 운영  
 
<백자에 물든 푸른빛> 전시와 연계하여 백자청화의 등장 배경, 청화에 쓰이는 재료와 다양한 문양의 의미를 알아보고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려 슈링클스를 이용하여 나만의 마그넷을 만들어본다. 가족 및 성인 대상으로 전시 기간 중 격주 토요일, 60분 동안 진행되며 가격은 15,000원이다.
자세한 사항은 코리아나 화장박물관(www.spacec.co.kr/02-547-9177)으로 문의하면 된다.
 
 

◈ 전시구성
 
1. 왕실의 의례를 담당하다
 
조선은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 왕실 의례를 중요시 했다. 이때 왕과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기로 용문양이 그려진 용준龍樽을 사용했다. 용준은 궁중 연례宴禮와 제례祭禮 때 술을 담거나 꽃을 꽂는 용도로 사용하던 중요한 그릇으로, 왕실 행사의 웅장함을 드러내고 잔치를 빛내는 역할을 했다. 영조실록에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준 제작에만 귀한 청화 안료를 사용하게 하는 기록이 있으며, 각종 의궤儀軌에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당시 백자청화용준이 왕실에서도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최고급 도자기였음을 알 수 있다.
 
관련유물: 백자청화운용문호


백자청화운용문호 白磁靑畵雲龍文壺 | 조선 19세기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용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그려 넣은 대호大壺이다. 입구가 길고 어깨에 비해 하체가 좁은 형태이다. 조선시대 왕의 상징인 용이 그려진 대호는 주로 왕실의 의례용으로 용준龍樽으로 불리며 사용하였다.


2. 선비의 벗이 되다
 
백자청화의 흰색과 푸른색의 미감은 청렴결백과 절제의 군자상을 추구하던 사대부에게도 선호되었다. 왕실용 그릇에 제한적으로 사용하며 민간에서의 사용을 규제했음에도 중국에서 들여오거나 관요官窯에 사사로이 제작을 의뢰하여 사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특히 17세기 이후 관요에서 사번私燔이 확대되고 문인의 백자청화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연적, 필통, 필가 등의 문방용품의 제작이 증가했다.
18세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팔각, 사각 등 각형 연적과 함께 두꺼비, 잉어, 복숭아 등 다양한 모양의 연적이 제작되었다. 문양에서도 선비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매죽문, 송죽문 등 사군자와 함께 산수문, 길상문 등이 새롭게 등장하여 당시 사대부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관련유물: 백자청화산수문연적, 백자청화매죽문병, 연상 등


백자청화매죽문병 白磁靑畵梅竹文甁 | 19-20세기
목이 길고 몸체가 둥근 형태의 병이다. 선비의 상징인 대나무와 매화를 병의 앞, 뒤에 청화 안료로 간결하게 그려 넣어 여백의 미를 살려 운치韻致를 더한다.



백자청화모란문합 白磁靑畵牡丹文盒 | 조선 19세기 
찬을 담는 뚜껑이 있는 둥근 그릇인 합으로 두 개의 대접을 붙여 놓은 듯한 형태이다. 뚜껑의 윗면 중앙에 청화로 수壽를 그리고 둘레에는 모란문을 풍성하게 그려 넣었다.



백자청화모란문표형삼층병 白磁靑畵牡丹文瓢形三層甁 | 조선 19세기
작은 항아리 세 개를 겹쳐놓은 듯 풍성한 양감이 살아 있는 삼층병이다.  예로부터 부귀의 상징으로 사용한 모란을 단순한 형태로 그려 넣고, 종이 위에 먹으로 그려낸 듯 농담 표현이 자연스럽다.


3. 아름다움을 가꾸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조선시대에는 단장丹粧을 위해 화장품을 담아두는 화장용기도 귀하게 여겼다. 토기, 자기, 금속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화장용기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 왔고, 특히 조선시대는 백자와 함께 푸른색 안료로 문양을 그린 백자청화 화장용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왕실과 상류층에서 백자청화를 즐기면서 여인들도 푸른빛의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진 화장용기를 선호하였다. 분갑, 분호, 유병, 분접시 등 작은 화장용기에 풀, 꽃, 문자, 기하 등 여러 가지 문양을 그려 넣어 여인들의 소품으로 사랑을 받았다.    
 
관련유물: 백자청화당초문분합, 백자청화초화문육각분수기, 백자청화수명유병 등

 

4. 일상생활을 담다

조선 초기 백자청화는 왕실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의례 및 제례의 용도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푸른빛의 백자청화에 대한 수요는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중인층 및 일반인들에게도 선호되었다. 19세기 경제 발전과 신분제의 변화, 관요의 민영화 등으로 수요 계층의 확대 및 생산과 유통에 있어 제한이 사라졌다. 이에 합, 접시, 양념통, 병 등 다양한 생활용기의 제작이 증가하면서 사용 계층의 범위도 확대되었다.
 
관련유물: 백자청화모란문합, 백자청화불수감문양념호, 백자청화모란문표형삼층병 등
 


백자청화불수감문호

 
5. 예를 갖추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유교적 상장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것을 효의 기본으로 여겨 상장례에 사용하는 기물을 잘 갖추려고 했고, 대표적으로 제기祭器와 묘지墓誌가 있다.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는 일상용 그릇과 구분하기 위해 바닥에 굽을 달았고 주로 금속, 나무 등을 사용했는데 조선시대는 백자 제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예기禮記』의 『곡례曲禮』 편에 ‘군자는 제기를 제일 먼저 장만하고 가난할지라도 제기를 일상생활에 사용하지 않고, 남에게 빌려서 사용하지 말라’는 기록처럼 제기를 중요하게 여겼다. 묘지는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등을 기록하여 무덤 안에 넣는 것으로 조선시대 자기로 만든 납작한 장방형의 묘지를 많이 사용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안료의 수급이 어려운 시기에도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값비싼 청화 안료를 사용한 제기와 묘지가 제작되었다.
 

관련유물: 백자청화제명제기, 백자청화묘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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