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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까매진 여든셋 스승… 옆자리 지킨 예순셋 제자
  • 작성일2021/01/07 10:12
  • 조회 498

한국화가 오태학 ‘사제동행전’

뇌졸중으로 오른쪽 손발 마비된 오 화백
왼손으로 그림 그리며 제2의 그림 인생

김선두·서정태·김진관·고찬규·이길우
은사 그림 옆 자신들 작품 나란히 전시
“괜찮네” 무덤덤한 스승 한마디에 반색
산동 오태학(오른쪽) 화백이 제자 김선두(왼쪽) 작가의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991년 첫 개인전 때 “이건 장난”이란 혹평을 들은 제자는 “(그림이) 괜찮다”는 스승의 말에 날아갈 듯 기뻐했다.  갤러리나우 제공
 

▲ 산동 오태학(오른쪽) 화백이 제자 김선두(왼쪽) 작가의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991년 첫 개인전 때 “이건 장난”이란 혹평을 들은 제자는 “(그림이) 괜찮다”는 스승의 말에 날아갈 듯 기뻐했다.
갤러리나우 제공

“괜찮네.” 예순셋 제자의 그림을 보고 여든셋 스승은 딱 한마디 했다. “잘했다”도 아니고, “좋다”도 아닌 무덤덤한 표현이 서운할 만도 한데 제자는 오히려 반색했다. “이 정도면 최고의 칭찬이에요. 학교 다닐 땐 괜찮다는 말도 거의 안 하셨으니까요.”

스승은 1970년대 고대 벽화 기법을 도입한 석채화와 수묵화로 한국화의 새로운 양식을 개척한 산동(山童) 오태학, 제자는 현재 한국화의 현대적 변화를 이끄는 대표 작가 김선두다. 둘은 중앙대 한국화과 사제지간이다. 1978년 입학한 김선두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산동에게 배웠고, 스승의 뒤를 이어 모교에서 제자를 길러 내고 있다.

스승 그림 옆에 제자 5명의 그림이 나란히 걸렸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지난 5일 개막한 ‘사제동행전’은 김선두를 비롯해 서정태 화백, 김진관 성신여대 명예교수, 고찬규 인천대 교수, 이길우 중앙대 교수 등 산동의 가르침을 받은 중앙대 제자들이 은사를 위해 마련한 그룹전이다.
오태학 화백의 1990년 작 ‘비천’. 색이 있는 돌가루로 그린 지본암채화로 고대 벽화 기법을 도입한 산동 양식의 묘미를 보여 준다.  갤러리나우 제공 ▲ 오태학 화백의 1990년 작 ‘비천’. 색이 있는 돌가루로 그린 지본암채화로 고대 벽화 기법을 도입한 산동 양식의 묘미를 보여 준다.
갤러리나우 제공
산동은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에 이르는 정통 한국화단의 계승자로 20대 초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연이어 특선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먹을 사용한 추상화 기법으로 1960년대 한국화에 새바람을 일으켰고, 1970년대부터는 먹을 쌓아 나가듯 석채를 쌓아 올려 채색과 수묵의 조화를 이룬 독창적인 산동 양식을 구축했다. 그러나 중앙대 부총장이던 1999년 불운이 닥쳤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손발이 마비됐다. 좌절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과 집념으로 휠체어에 앉아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제2의 화가 인생을 시작했다.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한없는 존경심으로 바라봤다.
고찬규 작가‘더 로드 테이큰’(The road taken). 갤러리나우 제공 ▲ 고찬규 작가‘더 로드 테이큰’(The road taken).
갤러리나우 제공
이번 전시에는 산동이 쓰러지기 전에 작업한 그림과 왼손으로 그린 작품 7점, 제자들이 2~3점씩 출품한 작품을 합해 18점이 걸렸다. 한 스승 아래서 수학했지만 간결한 형식미가 돋보이는 김진관, 청색과 회색조의 인물화를 그리는 서정태, 소시민의 일상을 채색화로 담아내는 고찬규, 동서양의 이미지를 중첩하는 이길우 등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김진관은 “작가로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본인의 길을 올곧게 가는 스승이었다”며 “대상을 수없이 관찰해 정수를 이끌어 내게 하는 사생의 기본기를 특히 강조하신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김진관 작가‘낙원 1’. 갤러리나우 제공

▲ 김진관 작가‘낙원 1’. 갤러리나우 제공

서정태 작가‘푸른 초상’. 갤러리나우 제공

▲ 서정태 작가‘푸른 초상’. 갤러리나우 제공

이길우 작가 ‘보동리 234-dog 3’. 갤러리나우 제공

▲ 이길우 작가 ‘보동리 234-dog 3’. 갤러리나우 제공

김선두는 “2학년 때쯤 선생님께 ‘그림이 완성됐으니 봐 달라’고 했다가 ‘그림에 완성이 어디 있냐’는 호통을 들었던 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김선두는 2002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서 화가 장승업 역할을 맡은 최민식의 그림 대역을 맡았을 때 제작진에게 이 에피소드를 들려줘 영화에 대사로 쓰이기도 했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선생님의 예술 세계가 재조명되길 바란다”고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오래 만나지 못하다가 개막 날 마스크를 쓴 채 조심스럽게 해후한 스승과 제자들은 전시장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토록 칭찬에 인색했던 스승은 이제 제자 한 명 한 명의 그림 앞에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열심히 노력해 이렇게 컸으니 기분이 좋네. 난 할 일 다했어.” 방명록을 쓰려고 장갑을 벗은 스승의 왼손이 까맸다. 먹물이 배어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제자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전시는 오는 26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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